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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Apr 05. 2019

감히 소크라테스가 될 순 없지만 그 정의의 길에

부산지역 학부모 세미나
패럴랙스 에세이북 철학과 산책 시 한 편 낭송

플라톤의 생애 전체를 논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고찰 없이 플라톤을 논할 수가 없다.


어느 학자의 평가대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태어나 소크라테스가 되었고 소크라테스로 죽었다고 할 만큼 플라톤에게 스승 소크라테스는 절대적이고 그의 죽음

또한 플라톤 철학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기술한 책이다. 짧은 내용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통해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70세 인생과 철학사상들을 접해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단 한 권의 책도

저술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들을 플라톤의 저술들을 통해 주로 접할 수 

밖에 없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의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변론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과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두 가지 죄목이다.


소크라테스는 70세의 나이에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500명의 배심원 앞에서

재판을 받는다.


그리고 자신의 전 생애에 대해 단 세 시간 동안에

변론을 스스로 해야 했다. 결과는 배심원 판정 220대 280으로 유죄를 판결받고 형량은 독배를 마시는 

사형을 선고받는다.


기원전 399년 아고라 광장 옆에 있는 아테네 법정은 소란스러웠다. 그날은 아테네의 현자이자 기인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는 날이다.


방청객들과 배심원들 사이에 대머리에 들창코를 한 소크라테스가 앉아 있었다. 그를 고발한 고발인은 혈기왕성한 젊은이 멜레토스와 당대 유명한 정치가

였던 아니 토스와 리콘이었다.


아무 힘도, 권력도 없는 70대 노인에게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는다거나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한 속사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정치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테네는 전성기인 페리클레스 시대가 끝나고

더 이상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맹주가 아니었다.


과거 에게해 동부지역의 맹주로 위세를 떨쳤

아테네의 위상은 사라지고 경제는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고 아테네 부자들은 이웃 도시국가로

도망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 귀족 정치가 잠시 자리 잡았으나 민주정이 곧바로 정치권력을 장악했다.

그들은 다시 아테네를 재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을 부정하고

귀족정을 두둔하는 듯한 행동을 하며

국가 공동체적 규율보다는 개인의 윤리를 강조했다.


더구나 소크라테스는 대화법을 통해

당시 유명한 정치인들을 욕보이는 행동을 일삼아

아테네 주류 사회의 눈엣가시가 되어 있었다.


이에 당시 정권을 고 있었던 민주정은

민주정과 대립하며 많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를 제거하여 민주정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현실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그의 지인들인 크리 비아스, 알키비아데스 같은

정치인들은 민주정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 무렵에는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들은

위험인물로 취급받았는데,

그런 그릇된 인식을 심어준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궤변도 서슴없이

늘어놓는 집단이었다.


결국 이들 소피스트와 민주정의 견제로

70세 노인이 된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독배를 마시는 사형을 선고받고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소크라테스 변론은

500명의 배심원들과 방청객 앞에서 진행된 변론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이 변론에서 자신에 대한

오래된 선입견과 오해에 대해서 변론하고 자신을

기소한 기소 내용에 대해 변론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소명이

철학하는 일이라 밝히며 동정을 구하지 않고

당당히 배심원들과 신께 판결을 맡기겠다는

변론을 한다.


결과는 배심원 220대 280으로 사형이 선고된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사형 표를 던진 배심원과 벌금형을 던진 배심원에게

마지막 말을 남기며 죽음과 사후 세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아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초월해서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지켜나간 대철학자다.


그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중시한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첫째, 그의 철학은 소피스트들이 상황에 따라

가변 하는 상대주의적 철학을 거부하고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윤리관을 신봉하였다.


둘째, 그는 어떤 주제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무지함을 깨닫고 참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런 토론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것이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목적이다.


셋째, 성찰하고 비판하는 삶이 이성적인 삶이라

판단하였다.


자기 삶을 뒤돌아 보고 매일 반성하는

것이 성찰하는 삶이라면,

자신의 사유와 행동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질문해서 반성하는 삶이

비판적인 삶이라 하였다.


넷째, 무지몽매한 시민들을 일깨우는,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신이 자신에게 내린

소명이라고 생각하였다.


소크라테스는

너무나 당연한 표현의 자유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는 철학적 삶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부정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그의 철학사상을 고수한 실천적 철학자였다.


소크라테스는 불의에 대항하기보다는

스스로 불의를 감수함으로써

그의 철학사상을 더욱 굳건히 지킨

대철학자라는 사실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소크라테스를

위대한 철학자로 칭송하는 이유를

플라톤의 저술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인문고전에 대한 사랑으로

많은 것들을 깨달아 벅찬 기쁨을 누려왔다.

이제 이 기쁨을 누구에겐가 전한다면

그 기쁨은 두 배, 세 배, 그 이상이 될 것이다.

감히 소크라테스가 될 순 없겠지만,

그 정의의 길에 한 걸음 보탬이 되길 바라본다



Plato Won


● 부산지역 패럴랙스 학부모 세미나가 있었다.

● 오늘 26(목)은 김해지역, 27(금)은 창원지역

    학부모 패럴랙스 학부모 세미나가 있다.

부산지역 학원연합회 정찬효 회장님
부산 이문희 본부장님과 학원장님과 한 컷
사랑스런 류기훈 원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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