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로마제국의 역사로 배우는 지혜

3-4, 루소 사회계약론

by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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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역사 속의 지혜

(1) 로마 역사의 시기 구분


지성 면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은 게르만인보다 못하고,

기술력이든 경제력이든 그 무엇 하나 자신 있게 내세울 것이 없었다며,

냉정한 평가를 받는 로마인들.

그런 그들이 세계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대제국 로마도 그 시작은 정말이지 초라했습니다.


이탈리아반도 테베레강 언덕의 조그마한 산등성이에서 작은 도시국가로 출발하여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까지 숱한 고난을 겪었지요.


로마 역사의 시기 구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하지만, 일반적으로 정치 체제의 변화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뉩니다.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의 건국으로 시작된 ‘왕정 시기’,


기원전 509년 귀족들이 에트루리아 출신의 폭군을 추방하고 군주제를 폐지하면서부터 약 500년간 이어진 ‘공화정 시기’,


독재를 꿈꾸던 카이사르가 암살되고

이후 권력을 잡은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서기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끝나는 ‘제정 시기’입니다.


(2) 로마 공화정의 전개


로마 역사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로마라는 대제국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루소가 이상으로 삼았던 로마 공화정의 경우도 그 시작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평민들이 권력을 쟁취하여 민주

공화정을 세운 아테네와 달리,

로마는 귀족 중심의 공화정이 실시되면서 권력 투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정치적 결정권에 이어, 전쟁을 통해

얻은 경제적 이익까지 귀족이 독점하자,

로마 병력의 주축이었던 평민들은 불만이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기원전 494년, 성스러운 산에

모인 평민들은 '더 이상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며 파업을 선언합니다.


이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국민에

대해 그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일깨워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평등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실현된다는 교훈도 주지요.


당황한 귀족들은 타협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평민들의 대의 기관인 ‘평민회’, 평민의 권익을 보호하는

관직인 ‘호민관’이 생겨났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제도적 보완을 거치면서

평민들이 귀족을 견제할 힘을 갖게 된 덕분에 로마 공화정은 불안했던 출발과 달리,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는 훗날 카르타고와 세 차례에 걸쳐 맞붙었던 포에니 전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3) 천년 제국의 멸망


영원할 것만 같았던 천년 제국 로마.

하지만 그런 로마도 멸망의 비극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점령지로부터 노예와 전리품이 쏟아져 들어오자 귀족들은 막대한 부를 독점하여 대농장을 경영했고,

평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자영농은 몰락해 버렸습니다.


이에 호민관들이 개혁을 시도했지만,

원로원의 계략과 암살로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 역시 호민관 출신이지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삼두 정치를 하던 카이사르가 독재를 꾀하자,

브루투스는 원로원과 공모하여 양아버지 카이사르를 암살함으로써 공화정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혼란을 평정한 옥타비아누스 이후 200년간 로마는 5 현제가 통치하는

제정 시대로 접어들지요.


이후 50년간 27명의 군인 황제가 등극하는 혼란기를 거쳐,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에 동과 서로 나뉘고 476년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명맥을 이어 가던 동로마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함락되면서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4) 추상화 이해하기


루소는 어려서부터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가장 좋아하여 상상 속에서 자신을 로마인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로마 시대에 지어진 가르교를 처음 보았을 때 로마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쉬워서 한숨을 지었다고도 하지요.


그런 루소였던 만큼 로마 공화정에서 정치적 이상을 발견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로마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실용성입니다. 로마는 다양한 민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었기에

서로의 이익을 조율하는 과정에서

법이 발달했고, 대제국을 운영하는 데 건물과 도로 등이 필요했기에 건축이 발달했습니다.


로마 건축을 대표하는 상징인 콜로세움입니다.


‘거대하다’는 어원을 지닌 이 원형 경기장에서는 전쟁 포로들 중에서 뽑힌 검투사들과 맹수의 대결이 벌어지기도 했지요.


콜로세움을 모티브로 한 추상화를 통해,

루소가 말하는 ‘로마 역사 속의 지혜’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언덕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

언덕 너머로는 태양이 빛나고 있군요.

언덕 반대편에 이제 막 건설되기 시작한 콜로세움은 대제국 로마의 소박한 출발을 상징합니다.


제아무리 거대한 건축물도 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로마의 역사도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지요.


초대 군주 로물루스는 테베레강 주위의 언덕에 로마를 건국하고, 견제와 권력 분립을 통해 정치 체제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이민 정책’

을 통해 인구를 늘림으로써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지요.


로마라는 이름 역시 로물루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콜로세움이 차츰 완성되어 가나 봅니다.

뼈대가 전보다 훨씬 견고해지면서 웅장한 위용이 드러나는군요.


이는 로마 귀족들이 단순히 폭군을 추방하는 데서 끝내지 않고,

군주제 폐지와 공화정 체제로의 전환까지 실현한 것을 상징합니다.


콜로세움에 드리운 검은 그늘은

권력 독점이 불러온 귀족들과 평민들의 갈등을 암시합니다.

콜로세움이 태양과 함께 빛나고,

짙푸른 지중해의 물결이 로마 주위로 흘러갑니다.


귀족과 평민 간의 오랜 갈등이

해결되고, 구성원들이 결속을 다진

것을 의미합니다.


평민회와 호민관직의 창설 이후에도

평민들은 자신의 권리를 계속 주장했습니다.


기원전 287년, 원로원이 평민회의 입법권을 인정한 호르텐시우스법

제정을 계기로 평민들은 마침내 법적 평등을 보장받을 수 있었지요.

핏자국과 함께 언덕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 둘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핏자국’은 카르타고와 벌였던 포에니 전쟁을 암시합니다.


‘언덕’은 견제와 권력 분립에 토대를

둔 로마의 정치 체제를 상징하지요.


구성원들 간 힘의 균형을 바탕으로

계급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긴 덕분에 로마는 국가의 번영이라는 목표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루소가 로마 공화정에 주목한 것은

정부 형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국방과 생산의 의무만 지닌 채

정치 활동과 경제 혜택에서는 소외되어 왔던 평민들. 자신의 권리를 찾으면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나는 민중의 힘이

곧 로마 공화정의 역사이자 로마 발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루소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감명을 받은 것입니다.


“나 자신의 의견이 국가의 공적인 일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극히 미미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자유 국가의 시민으로 태어나 한 사람의 주권자로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이상, 나에게는 정치를 연구할 의무가 있다.”


루소의 말이 우리의 가슴속에도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정치가 국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인간의 마음은 갈대라, 항상 흔들리고 변한다. 마음이 변하니 처음에 지녔던 올곧은 의지도 변하는 것이고 권력을 쥐면 그 올곧은 첫 마음도 변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권력이 우선 스스로 성찰해야 하고, 국민으로부터 견제받고 시스템으로 통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시스템이

정치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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