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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Aug 03. 2019

근대의 초입에서 만난  철학과 문학

근대의 시작은 상업이 발달하면서 지식에 대한 탐구욕에서 비롯

인류 문명은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정의감으로 지켜자다.

자연 과학의 발달은 중세 신 중심의 사고방식을
무너뜨렸다. 이제 사람들은 성경과 사제의 말씀이
아닌 스스로의 이성으로 이 세상을 이해하고 지배

하려고 하였다.

과학의 발전은 더 이상 자연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주었다. 중세 스콜라철학은 성경에 기초한 지식이 유일무이한 사실과 판단의 기준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이제 지식은 경험적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에 더 비중을 두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 철학자로는 경험론의 시조인 베이컨과 합리론의 시조인 데카르트를 들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베이컨은 올바른 학문을

연구하기 위해 경험론을 주장했다. 경험론이란

지식의 근원을 경험에 두는 이론을 말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시대는

절대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 문화에서도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 셰익스피어, 베이컨 등의 문인, 학자들을 배출했다.

베이컨의 경험론의 핵심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표현으로 압축된다.
베이컨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스콜라

철학의 연역법적 형식 논리를 배척하고 지식 확립의 방법으로 귀납법을 채택했다. 이 귀납법에 의해 자연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해서 자연을

연구하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험을 통한 지식이었다.베이컨은 그 경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때론 인간의 경험은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잘못된 지식을 낳기도 하는데, 바로 이것을 경계해서 베이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잘못된

선입견이나 편견을 없앨 것을 주장했다.

베이컨은 그것을 우상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했고,

이 우상을 없애야지만 올바른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것이다.

우상에는 4가지가 있는데,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이 그것이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이라는 종족으로부터 오는 선입견과 편견이다.

사람들은 모두 인간 위주로 생각한다.'새가 노래를 하고 나비가 춤을 춘다'는 표현은 지극히 인간 위주로

설명하고 해석하다 보니 이런 시적 표현이 나오는

것이다.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특수한 습관이나 생활환경에서

오는 선입견과 편견을 말한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바로 동굴의 우상인 것이다.

시장의 우상은
언어, 문자의 잘못된 사용에서 발생하는 선입견과

편견을 말한다. 도깨비나 천사, 악마 같은 말이 있으니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시장의 우상을 범했다고

할 수 있다.

극장의 우상은
그릇된 원칙, 학설, 전통 등을 무조건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 적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사실이라고

믿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베이컨은 <뉴 아틀란티스>라는 저서에서
미완성의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곳에는 항공기, 잠수함, 인공의 비, 합성금속 등이 있는 세계가 펼쳐진다. 대단한 상상력으로 실제 21세기에 다

현실화된 것들이다.

베이컨의 경험론은 전 유럽의 근대 철학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하며 근대철학의 경험주의적 사조를 열었다.

영국에 베이컨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데카르트가 있었다.

(1596~16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선언을 통해서 인간 이성의 독립성을

밝혔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근대 철학의 아버지

라고 불렀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다 의심해

보았고 의심하는 가운데에도 의심하는 나만은
유일하게 의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데카르트는 어릴 적 몸이 허약해 아침 기상시간이
늦었는데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천장에 파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그 파리의 위치를 어떻게

나타낼까를 고민하다 '좌표'라는 것을 발명하였다.

이 좌표를 통해 해석 기하학의 기초가 만들어진다.

해석 기하학은 수의 성질을 연구하는 대수학과 도형의 성질을 연구하는 기하학을 합친 학문을 말한다.

문학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태생으로, 최초의

인문주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페트라르카와

그의 제자 보카치오가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이라고도 함)

의 멸망에 따라 비잔틴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대거

이주해 온 것이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이탈리아에서 광범위한 그리스에 대한 지식욕을 불러일으켜, 얼마 후 플라톤 아카데미아가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중세 그리스도교 전통에

새로 생명을 불어넣은 인간 중심의 철학인

피렌체-플라토니즘이 탄생하였고 인문주의 문학도

꽃 피웠다.

피렌체는 꽃의 도시로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 유럽의 문화 중심으로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보카치오가 쓴 단편소설집 <데카메론>은 근대 소설의 시초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10일간의 이야기라는

뜻의 데카메론을 단테의 神曲과 견주어
人曲이라고 불렀다.

단테가 높은 이상을 내걸고 중세에 대한 경고를

했다면, 보카치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대상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미소와 풍자까지
섞어 묘사했다.

보카치오의 문학적 재능은 뛰어나 그의 작품은 세상에

큰 인기를 모았고 오래도록 산문의 본이 되었다.

중세는 봉건제도와 크리스트교로,
근대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절대왕정, 시민혁명,

산업혁명으로 압축 묘사할 수 있다.

중세의 시작은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에서

시작된다. 서로마제국은 동북의 게르만 족의 침입,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대외적인 위기를 맞았고 군대는 노골적으로 황제의 제위 쟁탈전에

개입하며 황제의 권력이 불안정했다.

이로 인해 황실 재정은 군대의 충성을 매수하기

위한 자금과 늘어난 변방의 방위 비용으로 더 악화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전란과 기근, 전염병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농촌에 무거운 조세부담으로

이농 현상이 심각했고 농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졌다.

5세기 말 게르만 족이 침입하자, 대토지 귀족들이
게르만족의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로마를 배신

하면서 로마는 멸망에 이른다.


결국 게르만족의 침입이 로마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그 속내는 내부 분열이었다.

내부 분열의 원인은 국가가 백성을 먹여 살리지

못한 무능이다. 아무리 인자한 군주라도 백성을

굶기는 군주보다는 폭군이라도 백성들을 배 부르게

먹여 살리는 군주가 낫다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이런 과거 로마의  실패 교훈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지중해 전역을 지배하던 단일 국가는 사라져

버렸다. 대로 마제국을 멸망시킨 게르만족은
야만족으로, 그들은 문자도 쓰지 못하는 민족이었다.


게르만족은 로마의 문명을 이어받긴 했지만,
글씨를 아는 사람이 드물어 행정을 꾸려나갈 수가
없었다. 또한 관료들 월급을 줄 돈도 없었다.
자연히 로마의 거대 제국을 통치할 지식이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게르만 족도 기독교로 자신들의 종교를 바꿀

정도로 로마인들과는 교류가 잦았다.

이런 게르만족의 민족이동은 기독교를 전 유럽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기독교는 야만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교리를 엄격하게 정비했고

여기서 이단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중세의 암흑기가 시작된다.

새로운 사상과 과학적 지식이 교리에 맞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렸다. 한편으로 여러 개로 나뉜

게르만 왕국들은 정확한 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해

눈만 뜨면 전쟁을 했다.

이 게르만족 안에는 프랑크족, 부루군트 족, 반달족,

앵글로 족, 서고트족, 색슨족, 동 고트 족, 유트족 등

여러 민족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 게르만족들은 국가 내에서도 왕위 계승과 영토 확장으로 싸움은 끝이 없었고 역사학자들이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질서 정연한 로마 시대가 끝나고, 야만인이라 불렀던 게르만인들이 폭력이 난무한 시대를 열었다.
이런 상태가 7세기부터 500년 이상이나 계속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되자 자기 영토 안에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주들은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고, 여기서 중세 봉건제가 탄생했다.

봉건제가 자리를 잡자, 안정된 시기가 찾아왔고

농업기술의 발달로 인구도 증가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농업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농경지를 떠나 성의 도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농노들도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민으로 해방되었다. 영주들은 농노가 농노로 있기

보다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돈을 많이 벌면 거기에

 따르는 세금을 거두는 게 낫다는 생각에
농노에게 자유인으로 거주 이전의 자유를 주었다.

그러니 시장이 있는 도시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수공업자들이 생겨나고 도시가 발달했다. 도시는
세금을 걷으니 자연히 왕의 힘이 커져 절대왕권

정치가 꽃 피웠고, 덩달아 교회도 커지고 상업도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살아난 화폐경제는 지식에 대한 욕구를 불러일으켜 13세기엔 많은 학교들이 만들어졌다.

학교 교육을 통해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해졌고 계산으로 상거래를 하기 시작하면서
중세는 저물고 서서히 근대가 열리기 시작한다.

중세시대는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부터

비잔틴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를 말한다.
중세 시대는 야만인 게르만족이 서유럽을 장악하고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지지고 볶고 싸운

시기였다. 그 중세의 종말을 고한 것은 아니러니

하게도 동로마 지식인이 동로마가 멸망하고 다시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오면서 였고 , 그 시점부터

근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세상은 사람이 바꾸고 사람은 교육이 바꾼다는 

말이 실감 난다.


중세가 가고 근대를 여는 길목에는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욕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불을 지핀 것이 바로

동로마제국의 지식인들이었다.


인류 문명은 호기심으로 문을 열고

감성으로 버무려지며

정의감으로 지켜진다.

Plato Won


신은 인간에게 호기심을 부여하는 실수를 저질러 인간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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