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끓이기란..

맛없는 음식 먹기 챌린지

by 여름비 CLIO

우리집에 라면이 꽤 많이 쌓여있다. 좀 전에 살펴보니까 몇 개는 소비기한도 지난 것 같다. 안 먹는 라면을 왜 이렇게 사재기하는 것인가.. 이게 약간 나의 고질병이거나 결핍에서 온 행동일 수도 있는데, 집에 먹을 게 없으면 마음이 불안하다. 냉장고가 비어있으면 마음이 허하다. 그래서 먹지 않으면서도 왠지 있어야 할 법한 음식들로 냉장고를 꽉 채운다. 좋아하는 음식도 자주 채워놓기는 하는데, 그건 다 먹어서 없어지는 게 불안해서 마지막 한두 개가 남았을 때는 먹지 않고 그냥 둔다. 그래서 결국 유통기한을 넘기고 소비기한까지 넘겨서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이렇게 채워두는 게 낭비이기도 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못 버리는 습관이다. 그래도 요즘은 많이 고치고 있고, 주기적으로 냉털을 하고 있어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다.


그렇지만 우리집에 쌓인 라면은 다른 식재료나 음식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라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사놓는 건데, 그렇지만 없어지는 게 불안해서 안 먹는 건 아니다. 내가 라면을 아주 아주 아주 못 끓이기 때문에 안 없어지는 것이다. 정말 나에게 있어서 라면은 너무나 어려운 요리이다. 남들은 다 쉽다고 하는, 요리 축에도 끼지도 못하는 라면을 끓이는 게 나는 나는 정말로 어렵다. 그래서 그 유명한 대사 '라면 먹을래요?' 같은 플러팅 따위는 할 수 없는 사람이 나다.


A: 요즘 식단 중이라, 이 시간에 라면은 좀...라고 했다면 영화는 달라졌겠지.



그래서 라면을 좋아함에도 좋아하지 않는, 라면에 대한 이중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마음이 있다. 내가 라면만 아주 잘 끓인다면 맨날 끓여서 먹었을 건데, 아무리 내가 만든 거지만 정말 이건 너무 하잖나 싶은 맛. 무엇이 문제일까. 내가 끓인 라면은 적당히가 없다. 물이 많거나 적거나, 혹은 면이 너무 불거나 덜 익거나. 물의 분량 조절은 매번 계량컵을 사용함에도 고쳐지지 않는다. 면의 익힘 정도는 물양 맞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 덕분에 '자기 전에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잘까?' 하는 유혹은 없다. 다이어트에 최적화된 요리 솜씨다.


가끔 친구들에게 내가 못하는 게 딱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자전거 타는 거고 다른 하나는 라면 끓이는 거라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그러면 친구들이 그 쉬운 두 가지를 왜 못하냐고 놀림 반, 끓여주고 싶다는 연민 반이다. 라면 봉지 뒷면에 적힌 방법대로만 해도 맛있는데(대기업의 엘리트들이 얼마나 피땀 흘려 만든 맛의 정석이겠는가!!), 왜 그걸 나는 못하는가.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진짬뽕이 너무 맛있다고, 맛이나 한 번 보라며, 이건 정말 봉지에 적힌 레시피대로 하면 정말 맛있다고 하며 한 봉지를 선물로 줬다. 흠.. 그럼 도전해 볼까.


친구가 선물해 준 진짬뽕



라면 전용 냄비에 봉지에 적힌 대로 550ml의 물을 끓이고, 건더기 스프를 넣고, 액상 스프를 넣고 면을 넣어 5분 동안 바글바글 끓이면 끝. 그래서 계량컵을 써서 분량대로 물을 넣고, 시간도 놓칠까 하여 타이머까지 맞춰가며 라면을 끓였다. 한 젓가락 먹고 든 생각은..


만약 나에게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램프의 지니가 있다면, 내가 원할 때마다 나타나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여달라고 소원을 빌어야지.


흠.. 레시피대로 끓였는데 맛있지 않은 건 무엇이 문제일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입맛이 이상한 것일까.. 하는 생각에 도달했고, 다음에 라면 맛있게 끓여주고 싶다고 했던 친구들의 라면을 꼭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문득 친구들이 했던 말 중 하나가 생각난다.



진짜 혼자 먹어서 맛없다고 느낀 건가. 흠.. 아니야. 흥.. 그럴 리가.. 아닌가. 모르겠네. 일단 그럼 다음엔 같이 먹어봐야겠네.




TMI) 여기까지 쓰고 나니 보고 싶은 영화가 두 편 떠오른다. 당연히 하나는 '봄날은 간다'이고, 다른 하나는 '3000년의 기다림'이다. 이 겨울 두 영화 모두 너무 잘 어울릴 것 같다. 이번 휴일에는 두 편 몰아보기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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