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여행 이야기 1
오랜만에 휴가를 다녀왔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내내 강의로 바빴다. 연휴가 있을라치면 그 연휴 기간 이후로 강의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명절 연휴에도, 여름휴가철에도 강의 준비와 강의로 시간을 보내느라 장거리 여행, 휴가는 갈 수 없었다. 역마살 가득한 내가 장거리 여행을 한 번도 못했다고 생각하니 조금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론 1년 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휴가를 좀 주자 싶어서 늦었지만, 조금은 이른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작년 12월쯤에 생각하길, 올해 1월이 되면 모든 것이 웬만큼 정리되고 헌법재판소의 판결만 기다리면 되겠지 했다. 그래서 1월 중순쯤으로 여행 계획을 잡았는데, 아니 이런.. 매주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 상황을 보고 있자니 여행 가도 되려나, 나도 집회에 나가서 힘을 보태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계속 몰입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잠시 조용히 쉬고 싶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들었다. 1월이 되었어도 12월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뭔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가자, 여행.
여행 장소는 남해. 사실 남해는 자주 온 곳이고, 최근 몇 달간은 2-3주에 한 번씩 다녀간 곳이다. '이러면서 장거리 여행을 안 했다고?' 하고 묻는다면.. '부산에서 남해까지 2시간 밖에 안 걸리는걸요?' 하고 대답할 밖에. 나에게 있어서 장거리 여행은 먼 곳을 다녀오는 게 아니라 오래 다녀오는 것이라서, 당일치기로 다녀오거나 다녀올 수 있으면 '장거리' 여행이 아니다(그런 이유로 당일치기로 다녀온 부산-수원 여행은 장거리 여행이 아니다). 그리고 숙박을 해야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소 2박은 해야 장거리 '여행'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은 아주 오랜만이라는 것이다.
남해로 장소를 정한 이유는 그냥 남해가 좋아서다. 남해 오고 싶어서 '남해에 멸쌈 먹으러 안 갈래요?' 하면서 매번 다른 친구들 꼬셔서 왔었는데, 그때마다 짧게 보고 가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엔 오래도록 여유 있게 보고 가고 싶어서 여행지를 남해로 선택했다. 섬인데도 산이 많고, 산이 많은데도 농지도 많고. 바다 옆을 가고 있다 생각했는데, 조금 뒤엔 나무 가득한 산이 등장하고, 그 산길 끝엔 많은 밭이 나타나고. 이런 변화무쌍한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다. 거기다 오래된 것들이 가득한데, 새것들이 그 오래된 것을 망치지 않고 잘 어울리고 있어서 좋다. 그리고 여기엔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이 또 가득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남해 여행은 내가 좋아해서 갈 때마다 보는 것들과 이번에 처음 보는 것들을 적절히 섞어서 다녀왔다.
첫날, 부산에서 오전에 일을 보고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첫날의 일정은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사촌해수욕장에 가서 일몰을 보는 것. 출발할 때만 해도 시간은 넉넉했다. 문산휴게소에 도착해서는 4시쯤에 체크인하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여유롭게 남해로 향했다. 하지만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남해에 여행 간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했더니, ‘가는 길에 여기 가봐, 저기 가봐’ 하는 추천이 날아들었다. 호기심 대마왕인 내가 놓칠쏘냐, 하며 그중 한 곳인 베이커리를 들렀는데 거기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들어가는 입구와 나오는 출구를 찾지 못해서 뱅글뱅글 돌다가 예상한 시간보다 30분을 더 소비했고, 체크인 시간뿐만 아니라 일몰 시간을 맞추는 것도 힘들어질 것 같아서 약간 마음이 급해졌다. 중간에 들르기로 했던 코스들 그냥 지나치고 숙소로 가서 체크인. 숙소에서 사촌해수욕장까지 40분 정도 걸리는데, 일몰까지 45분이 남았다. 충분하겠지? 짐도 차에 그대로 둔 채로 일단 달려달려~ 일몰 시간 5분 전에 도착. 와우. 아슬아슬했다.
일몰 보려 갔던 날은 너무너무너무 추웠던 날이라(부산의 바다가 얼었다는 뉴스가 날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해지는 동안 잠깐 서있는데도 볼이 꽝꽝 얼 것 같았다. 하지만 일몰이 너무 예뻐서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내가 이거 보려고 여기 왔네, 이거 못 봤으면 이 아름다운 걸 평생 모르고 살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내내 서서 계속 바라봤다. 다시 봐도 너무 예쁘다.
부산에도 바다가 많고, 또 일몰이 아름다운 곳도 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바다는 다대포 바다인데(이 바다가 이날 얼었다고 한다), 여기 일몰이 정말 아름답다. 그래서 가끔 찾아가는데, 사촌해수욕장의 일몰은 부산의 바다와는 또 다른 모습의 일몰이라 넋을 놓고 계속 봤다.
해가 완전히 저 너머로 넘어가고 남은 빛깔들의 그라데이션이 너무나 예뻤다. 태양의 붉음과 겨울의 파랑이 만난 하늘. 이 모습도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봤다. 빛깔이 사라지자 너무 추워져서 얼른 숙소로 돌아갔다. 가는 길도 40분이지만, 일몰을 봤다는 생각에 흥얼거리면서 돌아왔다.
숙소에 와서 따수운 방에서 몸을 좀 녹이고 공용으로 쓰는 별채로 건너갔다. 2박 3일 동안 묵은 게스트하우스는 내가 남해에 처음 여행 왔을 때 묵었던 숙소이기도 하다. 사실 이 게스트하우스에 묵기 위해서 남해 여행을 왔었다. 그때도 2박을 묵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았어서 언제 남해가지~ 언제 게하 가지~ 하고 노래를 불렀다. 다시 와도 여전히 좋다.
숙소의 별채는 주인 부부의 서재인데, 객들에게도 내어주고 있는 공간이다.
서재에 책들이 가득한데, 다들 내 취향의 책들이다. 우리 집에 있는 책들이 다 여기에 있어서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나도 이런 서재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 이런 서재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나요..
여기에 있는 책들은 다 꺼내어 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읽어야 할 책이 있기 때문에 내가 가져간 책, [토지]를 읽었다. 올해 두 독서모임에서 각각 대하소설 하나씩 읽기로 했는데, 하나는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이고, 다른 하나는 최명희 선생님의 [혼불]이다. 내가 왜 그런 무모한 짓을 시작했을까.. 하며 자책하지만, 또 이렇게 쫓기면서(?) 읽으면 두 소설 모두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라고 쓰고 욕심이라고 읽는다)도.. 하지만 역시나 내가 잠깐 미쳤었나 보다. 그래도 읽는 동안은 즐거우니까, 괜찮아..(눈물 닦쟈..)
[토지] 읽으면서 저녁식사. 남해는 다 좋은데, 혼자서 식사할 곳이 마땅치가 않다. 식당들이 빨리 문을 닫기도 하지만, 1인분이 가능한 식당도 잘 없다. 물론 찾으면 있겠지만, 내가 먹고 싶은 건 1인분을 안 판다. 남해에 자주 오고 싶어도 망설여지는 이유 중 하나가 식사문제. 남해 친구 사귀고 싶다. 그럼 내가 밥은 늘 사줄 텐데. 남해친구 급구다. 아무튼 그래서 저녁으로 먹으려고 부산에서부터 빵을 사 왔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아주 계획적인 먹제이(먹J) 되시겠다.
토지를 다 읽으면 하동으로 답사를 가기로 했다. 부산에서 하동은 가깝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토지 책 뒤편에 붙은 지도를 봤는데, 하동과 남해가 무척 가까운 거 아니겠는가? 나는 '부산에서 하동', '부산에서 남해'의 감각으로만 지리를 이해하고 있어서 당연히 부산에서 각각 먼 곳과 먼 곳이니까 하동과 남해도 먼 곳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부산과 남해보다 하동과 남해가 더 가깝다. 앗, 이런 소외감. '왜 나 빼고 너네끼리 친해?' 하는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인가. 어쩐지 남해 곳곳에 하동까지의 거리를 적은 표지판이 많더라니. 사람은 자신을 중심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는가 보다. 아무리 객관적 사고를 하려고 해도,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또 한 번 머리의 돌을 깬다.
오랜만에 조용한 곳에서 책을 읽다 보니 벌써 취침시간. 내일 아침에 보리암에 일출을 보기 위해선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7시 30분 쯤해서 해가 뜬다고 하니 5시가 조금 지나면 일어나서 나갈 채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근데 내일 날씨가 많이 흐리다는 예보가 있다. 날씨도 추운데 가지 말까, 하고 고민이 됐지만 다시 자세히 보니 오전 10시 이후부터 흐려진단다. 안 가고 후회하느니 가 보고 후회하자 싶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과연 내가 내일 아침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