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여행 이야기 2
남해 여행 이야기 1
(1편에 이어서)
나는 보리암 일출을 보러 갈 수 있을까?
이날 아침 일출 예정 시각은 오전 7시 35분쯤. 숙소에서 보리암까지 차로는 30분 거리였지만,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가는 거리까지 하면 넉넉잡아 1시간. 또 추운 겨울이라 길이 얼어있을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가는 거 생각하면 1시간 조금 더 걸린다고 생각하면 6시 정도에는 나와야 될 것 같았다. 그러면 5시 반쯤에 일어나서 씻고 준비해야겠네. 아.. 피곤한데 가지 말까 고민하다 전날 밤에 잠이 들었다. 그런데 5시 조금 넘어서 눈이 떠졌다. 이건 보러 가고 싶은 거겠지? 그런데 너무 추워서 나가기가 싫은데. 가지 말까.. 보리암 올라가는 길도 가파르고 나무가 우거져서 얼음길일 것 같은데… 하며 안 갈 이유를 계속 찾았다. 그러다 나 이거 보려고 남해 왔는데,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왠지 이런저런 이유로 일출 보러 안 가면, 앞으로 다른 일들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고 안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벌떡 일어나 세수하고 옷만 챙겨서 입고 숙소를 나왔다.
그런데, 추워도 너~무 추웠다. 나의 애마 프리지안도 간밤에 너무 추웠는지 꽁꽁 얼었다.
이렇게나 추운데 갈 수 있을까.. 길 많이 언 건 아니려나.. 걱정이 됐지만, 일단 출발해 보자. 사실 남해에 오기 며칠 전, 뒤 타이어 모두 펑크가 나는 바람에 겸사겸사 바퀴 4개 모두 타이어 교체를 했다. 거의 새 거니까 괜찮겠지. 그리고 이번엔 SUV 전용으로 바꿨으니까 충분히 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시동을 걸고 유리열선을 켜고 차를 녹였다. 그렇게 한 10분 정도 있으니 슬슬 엔진오일 온도가 올라간다. 그럼 이제 출발. 예열하는 동안 시간이 좀 지체되어 시간상 조금 빨리 가야 했지만 밤길이라 빨리 달리진 못했다. 아침에 조금만 덜 갈등할걸. 그랬으면 더 일찍 나와서 여유롭게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일, 뭐 어쩌겠어. 앞으로는 할까 말까 고민될 땐 무조건 하자. 아무튼 지금은 안전하게 보리암까지 가보자고.
보리암까지 가는 길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정상 주차장까지 오르는 길도 생각보다 그리 얼지 않았고, 타이어도 거의 새거나 마찬가지라 미끌림도 거의 없었다. 역시 실제는 내가 예상한 것과 다르고 또 예상보다 쉽게 풀린다. 앞으로 고민될 땐 겁먹지 말고 무조건 하자. 주차장에는 생각보다 차들이 꽤 있었다. 다들 일출을 보러 왔나 보다. 주차장에서부터 걸어올라 가는데 슬슬 해가 뜨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직 일출시간까지는 20분 정도 남았는데. 빨리 올라가자.
일출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는데 세상이 무척 밝아졌다. 곧 떠오르려나. 빨리빨리 올라가자.
예상시간까지 이제 3분 정도 남았다. 그런데 주변에서 자꾸 사람들이 해 안 뜬다, 구름이 많아서 해가 안 뜨는가 보다, 하며 굉장히 많은 의견을 쏟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추측성 발언에 약간 피곤해질 무렵, 어떤 남자분이 계속 중얼거리는 게 귀에 쏙 박혔다. '해는 동쪽에서 뜨는데, 남해는 남쪽에 있잖아. 그런데 해 뜨는 게 보인다고?' 하던 분의 말씀. 아.. 선생님.. 그 말에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 농담하신 거겠지.
여러 사람들의 추측성 발언에 '오늘 해 뜨는 것 못 보는 것인가', '오늘은 아침부터 흐린가 보네. 괜히 왔나' 하며 약간 마음이 흔들릴 때쯤 해가 조그맣게 얼굴을 드러냈다.
보리암에서 보는 일출은 정말 장관이었다. 많은 섬들과 바다를 비추는 태양빛이 점점 많아지면서 마음이 벅찬 느낌이었다. 실제로 보면 더 아름다운데, 카메라가 이걸 다 담지 못하네. 비록 1월 1일은 아니지만, 떠오르는 일출을 보면서 소원이랄지, 새해 다짐이랄지, 뭔가를 염원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러진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특정한 날에 무엇인가를 다짐하고 소망하는 것이 그렇게 효엄, 혹은 효과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랄까. 적어도 나에겐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새해에 무언가를 목표하고, 계획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것, 그리고 오늘 틀린 것을 내일은 틀리지 않고 수정해 가는 것, 그렇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서 말이다. 인생의 목표라는 건 특정한 날 세우는 게 아니라, 성실히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러면 그때 그 목표를 향해서 또 성실히 살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출을 보면서도 무념무상으로 그저 아름답구나 하고 지켜보기만 했다. 이걸 보며 오롯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멋진 일 아닐까.
일출 봤으니 얼른 숙소로 돌아가자. 늦으면 조식 못 먹는다구.
게스트하우스 조식은 몽글몽글 잘 끓인 누룽지다. 어제부터 배가 살살 아파서 먹는 거 조심해야겠다 싶었지만, 이 누룽지는 놓칠 수 없지.
반찬까지 숟가락으로 삭삭 긁어먹었다. 좀 부족한 것 같지만, 그래도 배 사정도 봐야지. 많이 먹으면 아파.. 그렇지만 후식으로 유자차와 붕어빵까지 클리어. 따뜻하고 달콤한 것들을 먹고 났더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럼 이제 카페로 가볼까.
내가 좋아하는 돌창고.
여긴 내가 남해에 처음 왔을 때 제일 처음 만난 곳이기도 하다. 내가 제일 처음 만난 남해라고나 할까. 나한테 '남해란 이런 곳이야'라는 걸 알려준 곳이다. 처음 왔을 때 돌창고에서 하던 '보호수 프로젝트'를 보고서 완전 반해버렸다. 어떻게 이런 기획을 하고, 또 그걸 실현시킨 거지, 하며 전시를 한참 동안 보고 또 봤다. 그리고 돌창고에서 만든 보호수 책자를 가지고 남해의 보호수 몇 곳을 또 방문하기도 했다. 기회가 되면 보호수 보러 또 가고 싶다.
돌창고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가 커피가 내 취향이기 때문이다. 돌창고에서는 두 종류의 원두로 커피를 내려주는데, 나는 돌창고 블렌드를 좋아한다. 산미 없이 묵직한 맛. 요즘은 산미 있는 커피가 유행인 건지, 산미가 없는 커피를 찾기 힘들다. 산미 있는 커피를 안 좋아해서 내 입에 맞는 원두를 찾기 힘든데, 여기 돌창고 블렌드가 딱 내 입맛이다. 그래서 남해 갈 때마다 방문해서 원두를 구입해 온다(그런데 이번엔 깜빡 잊고 원두를 못 사 왔다. 당분간 커피 없는 생활을 해야 할 것 같다. 벌써 슬프군). 이번 남해 여행에도 여기 커피 마시고 싶어서 몇 번을 다녀간지 모른다. 남해에 온 첫날은 카페 휴무일이었지만,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이에 휴무일 바뀐 거 아닐까 하는 헛된 기대로 카페 주위를 어슬렁 거렸다는(카페 주변에 어슬렁 거린 사람, 접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나쁜 사람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 디저트도 맛있다. 쑥개떡과 미수티라도 무척 맛있다. 그렇지만 오늘은 배탈 이슈로 커피만 주문하고 미수티라는 선물용으로 포장.
돌창고는 내가 처음 왔을 때도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더 유명해져서 타이밍을 못 맞추면 아쉽지만 돌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운 좋게 매번 올 때마다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차지한다. 이번엔 좀 오래 있어야 해서 오픈런으로 입장.
인 줄 알았지만, 누룽지 먹느라 조금 늦었다.
원래 처음 남해 여행을 계획했을 땐 둘째 날엔 노도에 다녀올 생각이었다. 노도는 벽련항에서 배를 타고 5분이면 갈 수 있는데, 김만중의 유배지이다. 그래서 간 김에 벽련마을에서 암각화도 찾고, 노도에 가서 김만중 유배지도 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낼 계획이었다. 벽련마을에 암각화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몇 년 전에 듣고선 여긴 가야 해! 하고 기회가 될 때면 가서 찾아보는데(사실 자주 가진 못했다) 번번이 실패를 했다. 노도도 뱃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번번이 못 갔다. 2박 3일 일정이니까 이번엔 갈 수 있겠지! 하며 계획을 짰지만, 인생.. 계획대로 될 리가 있나. 남해여행 다음주에 강의가 잡혔다. 어쩌겠나.. 준비해야지. 그래서 오전 내내 돌창고에 앉아서 강의준비를 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커피 마시면서 강의 준비하니까 좋네. 돌창고는 왜 이렇게 먼 곳에 있나. 집 근처에 있으면 좋겠네. 그러면 진짜 자주 올 텐데.
내가 좋아하는 친구, 좋아하는 가게는 있지만 동네 친구, 단골 가게 같은 게 나한테는 없다. 내향적인 성향이라 붙임성 있게 다가가거나, 넉살 좋게 아무에게나 말 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누군가와 금방 친해지지 못하는 편이다. 오래도록 지켜보고(응?? 스토커야??) 관찰한 뒤에야 겨우 말 거는 사람. 그렇게 겨우 친해지면 이별은 또 어찌나 빠른지. 헤어질 사람하고만 친해지나 싶게 친해지면 다들 멀리 떠나더라. 그런데 사람만 떠나가는 게 아니더라는.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도 어쩜 그렇게 빨리들 폐업하는지. 역시나 낯가림 이슈로 대놓고 사장님들께 아는 척을 잘하지도 않고, 자주 가지도 않아서 사장님은 모르는 단골이 되는 경우가 다수지만, 아무튼 내가 좋아하는 가게들은 왜 그렇게들 또 폐업이 잦은가. 아마 높아지는 임대료 때문에 다들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거나 폐업을 한 것이겠다. 최근에도 내가 아주 애정하는 가게 몇 곳이 임대료를 버티지 못하고 폐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정을 이해는 하지만 역시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나에게서 다 멀어지는구나 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가까이에 오래 있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진짜 운이 좋아야 가능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은 다 멀리 있다. 뭐, 멀리 있어도 내가 오면 되지!
내가 좋아하는 게 많은 남해에 자주 오고 싶은데. 남해에 친구가 있으면 더 자주 올 텐데,라는 넋두리 비슷한 푸념을 늘어놓으니 친구가 남해에 살고 있는 자신의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과연 내가 남해 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 하는 설렘과 그럼 나 이제 남해 자주 올 명분이 생기는 건가 하는 흥분으로 친구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