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여행 이야기 3
남해 여행 이야기 1
남해 여행 이야기 2
내가 돌창고에서 강의 준비도 하고 글도 쓰면서 한낮의 일정을 보내는 동안, 부산에서 또 남해 여행을 온 사람이 있었다. 나에게 자신의 남해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온 친구 G. 남해 친구 있으면 좋겠다고, 남해 친구 있는 사람들 너무 부럽다고 노래 불렀더니 자신의 남해의 친구를 소개해주겠다고 한다.
아.. 저에게도 드디어 남해 사는 친구가 생기는 건가요?
내 친구 G를 잠깐 소개하자면, 이름도 몰라요 나이도 몰라요, 무슨 일 하는지도 모르지만 좋아하는 게 같아서 친해진 친구이다(그렇지만 지금은 이름도, 하는 일도, 어디 사는 지도 안다). 그런데 나와 정말 다른 성향의 친구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말해보자면, 나는 쌉 T에다가 대문자 J 성향이라면 친구 G는 세상 다정한 F에다 계획 세워봤자 일이 생겨서 지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P 되시겠다. 그러니까 나와 정반대의 성향. 남해여행 계획을 세운다 치면, 나라면 엑셀 시트에 시, 분 단위로 계획을 짜고 지도까지 첨부해서 이동시 동선까지 표시할 테지만, 강성 P성향의 친구 G는 '일단 남해에 가면 뭐든 하게 되어 있어~'라고 하는 스타일. 그래서 내가 계획대로 안되어서 스트레스받고 있으면 G는 '이바라, 어차피 계획 세아도 계획대로 안된다고~'라고 말하는 친구다. 그렇지만 세상 다정한 사람이라 '여름비님 괜찮아요?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우리 단 거 먹으까요?' 말해주는 사람이다. (사실 나는 플랜 B, C 중 어떤 걸로 할까 고민하고 있겠지만..) 아무튼 다정하고도 낭만적인 친구가 소개해주는 친구라니. 그 친구도 얼마나 다정한 사람일까.
그런데 친구 G에게 문제가 생겼다. 전날 끝났어야 할 업무가 조금 잘못 처리되어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남해에 오기로 한 날 아침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정시간보다 조금 많이 늦게 도착했다. 그가 늘 ‘계획만 세웠다 하면 무슨 일이 터진다’ 했는데, 역시나 그의 말대로였다. 그렇지만 나에겐 플랜 B와 C, D… 등이 있으니 괜찮다. 어차피 써야 할 글도 있고, 읽어야 할 책도 챙겨 왔으니 기다리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남의 업장에서 이렇게 오래 시간을 보내도 되나 하는 걱정이 슬며시 일었지만. 배만 안 아팠어도 메뉴판 다 쓸었을 텐데(미안해요, 사장님. 다음엔 1인 다메뉴로다가 주문하겠습니다).
3시쯤 친구 G가 도착했다. 일단 왔으니 내가 좋아하는 커피부터 맛 보여 드리고. 조금 수다 떨다가 자리를 이동했다. 혼자서 오랫동안 기다린 나에게 미안하다고 어디 가고 싶은 곳이 없냐고 하길래, 늘 가보고 싶었던 앵강다숲과 앵강전망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이 두 곳은 보리암에 갈 때마다 스쳐 지나가며 본 곳인데, 지날 때마다 언제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도 번번이 그 타이밍을 놓친 곳이다. 앵강다숲은 꽃무릇이 아득하게 필 여름철 무렵에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앵강다숲’을 검색하면 늘 꽃무릇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사진이 제일 먼저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갔던 날은 하필이면 이번 겨울 가장 추웠던 기간이었고,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너무나 어울리는 날씨였다. 그렇지만 그런 날씨조차 낭만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게 남해의 매력인가. 앵강다숲 앞의 앵강만 바다는 그저 좋았다.
바다 가운데에는 어업을 위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어업 무지렁이라서 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민들의 삶이 보존되는 곳에서 겉절이로 지켜볼 수 있는 건 너무나 좋은 일이다. 내가 부산의 바다 중 기장과 다대포를 좋아하는 이유도 어민들의 삶이 있어서다. 지역민의 삶이 외지인에 의해 파괴되지 않기를 자주 기도한다. 말없이 바다를 한참 동안 보다가 “그럼 이만 갈까요?” 하는 말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앵강다숲 공원도 지역민들이 자주 이용하는 공원인가 보다. 생활체육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친구 G는 생활체육기구 마니아라 이 기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본인 말로는 오십견(!)이 와서 이런 기구들이 보일 때면 꼭 어깨 돌리기를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굉장히 시원하다면서 나에게도 꼭 해보라고 권한다.
G는 많은 기구들 중 허벅지 운동하는 기구를 제일 마음에 들어 했다. 남해에 이렇게나 훌륭한(?) 체력단련 기구가 있다니, 남해 이사 오고 싶다고 했다. 역시 생활체육기구 마니아다운 발언이다. 그런데 기구가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제조사가 어딘지 궁금해했다. 우리는 여러 기구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제조사를 찾아봤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했고, 평일에 남해군청 문화체육과에 전화해 보자고 했다(물론 안 했다. 그리고 담당부서가 문화체육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아무 말이나 했다는 말이다). 짧은 체력단련을 마치고 우리는 앵강 전망대로 갔다.
앵강만 전망대로 가는 길은 조금 헷갈렸는데, 다행히 그 앞에 푸드트럭들이 있어서 입구를 놓치지 않고 찾았다. 오갈 때마다 보던 푸드트럭. 거기에선 뭘 팔까 늘 궁금했지만, 차마 용기 내어 가지 못했던 곳. 역시나 이번에도 푸드트럭을 지나쳐서 전망대로 갔다.
앵강 전망대는 여태껏 보지 못한 좀 낯선 느낌의 전망대였다. 동그란 도넛 모양의 우주선이 내려앉은 듯한 느낌이랄까. 문득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 웨어 올 앳 원스’의 조부 투파키의 베이글이 떠올랐다. 날씨마저 흐려서 왠지 여기 들어가면 다 암흑 속으로 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전망대를 한 바퀴 돌고, 또 뱅글뱅글 올라가서 앵강만 바다를 또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는 바다는 또 달랐다. 아마 맑은 날에 오면 또 다른 느낌이 들겠지. 봄이 되면 한 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내려왔다. 그때는 푸드트럭도 가봐야지. 그런데 전망대 앞에 한국전쟁과 관련한 기념비가 있었는데, 조금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전쟁과 이 앵강만은 무슨 관계일까. 전망대는 아직 미완성이었고, 계속해서 뭔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완성이 되면 저 조형물의 정체도 알게 되겠지. 다음에 올 때는 완성되어 있길 기대한다.
이제 오늘치 남해 투어가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남해 친구들 만나러 갑시다.
친구 G의 남해친구들은 독일 마을 근처 어느 곳에 있다고 했다. G의 말에 따르면, 남해 친구의 집에 가면 누워서 멍 때리다 먹다 멍 때리다 먹다를 반복하다 부산으로 복귀한다고 했다. 그 집에 들어가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흠.. 그런 집이 있다고요? 남해에 왔는데 집에만 있다고요? 너무 궁금해진다. G의 남해친구 집엔 남해친구뿐만 아니고 자신이 친하게 지내는 다른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그 친구들은 경기도 지역에서 왔는데, 자신을 포함해서 넷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이고, 친구의 집엔 그 친구들의 가족들도 함께 있다고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들 시간을 맞춰서 남해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나에게 남해에 사는 친구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소개해주고 싶어서 나를 초대했다고 한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자신의 오래된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에는 아무나 데려갈 수 없다. 오래된 관계에 새로운 사람이 섞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결이 비슷해야 한다. 단단한 유대관계를 보고 새로운 사람이 뒷걸음질 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새로운 사람이 오래된 친구들의 관계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런 위험부담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신의 오래된 친구들에게 소개해준 것이다. 나를 믿어준 G가 너무 고마웠다.
나는 G에게 친구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눈썹이라도 그려야겠다고 호들갑을 떨었고, G는 그런 예의 필요 없다고 뭐 하러 화장을 하냐고 농을 쳤다. 그렇지만 G의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정말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만든 금귤정과와 돌창고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를 포장해서 갔다. 다행히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를 모두 좋아해 줘서 자못 뿌듯했다. 금귤정과와 다과를 놓고 둘러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꼭 예전부터 알던 사람인 것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했다. 낯을 가리는 탓에 처음 만난 자리에선 말수가 현격히 없는데, G의 친구들은 격의 없이 대해줬고, 그래서 금방 그 분위기에 동화되었다.
전날부터 앓던 배탈로 음식을 못 먹고 있다고 하니 너도나도 상비약을 꺼내서 내 입에 털어 넣어주곤, 수시로 내 컨디션을 체크해 주셨다. 사실 근처 약국이 눈이 들어오지 않아서 약을 못 사고 있던 차였다.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장소라고 하더라도 낯선 곳은 낯선 곳이었다. 그런데 낯선 고장에서 환대와 걱정을 받고 있으니 울컥한 마음도 들었다. 남해라는 지역이 사람을 따뜻하게 만드는 건지, 이 사람들이 따뜻해서 남해까지 따뜻한 곳으로 만들어주는 것인지.
그날 저녁 G와 그 친구들과 오랜만에 시끌벅적 따뜻한 저녁을 보내고 나는 숙소로 돌아왔다. 다들 자고 가라고 잡았지만 이미 숙박비를 지불했고, 또 내가 가지 않으면 게스트하우스 내외분이 대문을 잠그지 못하실 게 분명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숙소에서 체크아웃을 하고 다시 G의 남해친구네 집으로 가서 오후까지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왔다.
남해에서의 또 다른 경험을 하나 쌓았다. 남해가 조금 더 좋아졌고,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남해를 발견한 것 같아서 행복해졌다. 남해에 친구가 있다는 건 좋은 것 같다. 남해 친구의 집에서 창밖으로 멍 때리며 건너 남해 바다와 들을 보고 있으니 너무 좋다. 우리 집에서 가까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남해 와서 살면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