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있어도 여전히 좋은 것들

남해 여행 이야기 4

by 여름비 CLIO


남해 여행 이야기 1

남해 여행 이야기 2

남해 여행 이야기 3

이전까지의 남해 이야기





남해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마지막 날은 이제 해야 할 일들이 없으니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전날 새벽에 보리암에 다녀온 덕분에 많이 여유로웠다. 전날 아침에 춥다고 안 갔으면 마지막 날 아침에도 굉장히 오랫동안 갈등을 하며 나를 자책했을 거다. ‘아 어제 갈 걸..’ 하면서 말이다. 어제 다녀온 나를 칭찬. 일어나 샤워하고 짐을 챙기고 게스트하우스의 별채로 갔다. 오늘도 따끈한 누룽지와 소박한 반찬들.


소박한 누룽지와 반찬들

이 누룽지는 먹을 때마다 감탄한다. 어떻게 이렇게 짭조름하게 간을 잘 맞추시는 걸까. 어떻게 끓이시는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마침 옆방에 묵었던 손님이 남자 사장님께 묻는 걸 듣게 되었다. 자른 미역을 불려서 누룽지와 같이 끓인 다음 국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맞추는 거라고 하셨는데, 정확한 레시피는 여자 사장님께 물어봐야 한다고 하셨다. 흠.. 나중에 나도 한 번 집에서 끓여 먹어 봐야겠다. 근데 집에 누룽지도 미역도, 국간장도 없는 것 같은데..


누룽지를 다 먹고 나서 남자 사장님과 짧은 담소를 나눴다. 어제 내가 아주 늦게 온 것이 신경 쓰이셨는지 몇 시에 들어왔냐고 물어보셨다. 9시 반쯤 들어왔다고 하니, 어딜 다녀온 거냐며 궁금해하셨다. 부산에서 온 친구와 함께 남해에 거주하는 친구 집에 잠깐 다녀왔다고 했더니 다행이라고 하셨다. 남해는 해가 지고 나면 웬만한 가게들은 다 문을 닫아서 갈 만한 곳이 없는데, 늦게까지 오지 않아서 걱정을 하셨다고 하셨다. 새삼 부산과 남해의 시간 감각이 다름을 느꼈다. 근대의 발명이 시간이고, 근대 이후 인간의 삶은 자연이 아닌 정해진 시간에 따라 살아간다고 하지만, 어떤 곳은 여전히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기도 한다.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며 사는 삶이 궁금해진다.


사장님께 남해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여쭤봤다. 사장님 부부가 원래부터 남해에 사셨던 건 아니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언제 남해에 정착하신 것인지, 그리고 많고 많은 시골 중에 남해에 오신 이유는 무엇인지 여쭤봤다. 두 분은 서울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남해로 정착을 하셨는데, 오신 지 8년 정도 되셨다고 한다. 언젠가는 시골에 가서 살기로 했는데, 주변 상황과 고민하던 시기가 어떻게 딱 맞아서 이주를 하게 됐고, 남해로 이주지를 정한 이유는 가족들이 남해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역시 아는 사람이 있다는 건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시골로 이주할 때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일 수 있겠다.


남해에 살면 심심하지 않을까. 그래도 둘이라서 괜찮으려나. 비슷한 결의 사람들이 만나 같은 꿈을 꾸며 살아가는 부부들을 볼 때면 굉장히 부럽다. 그런 면에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부부도 굉장히 부러운 커플이다. 두 분을 떠올릴 때면 늘 책 읽는 옆모습이 먼저 생각난다. 언제나 책을 읽고 있다가 손님을 맞이하신다. 부부는 책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게스트하우스 자체가 거대한 서재의 느낌.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 게스트하우스 하시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책으로 가득 찬 집이다. 그런 집 나도 갖고 싶어서 부럽고, 또 둘이서 좋아하는 거 하면서 살고 있어서 더 부러웠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었나 보다. 아까 누룽지 레시피를 물어봤던 손님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사장님 부부처럼 이렇게 사는 것도 부럽고, 방명록에 25주년 기념으로 게스트하우스로 여행 오신 것도 너무 부럽다며 자신도 자신과 좋아하는 게 비슷한 사람과 만나서 결혼 기념으로 여기에 오고 싶다고 했다. 낯가림쟁이라서 그 대화에 낄 순 없었지만 나도 마음속으로 엄청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명록에 적힌 글. 25주년 기념으로 오셨다니. 여러모로 참 부럽습니다


사장님과 남해에 사는 것,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부산에 살고 있고, 내가 하고 있는 일도 무엇이라 말씀드리며 여러 이야기 나눴고, 남해가 너무 좋아서 몇 년 전부터 남해에 종종 왔었는데, 최근 몇 달은 2-3주 간격으로 남해에 왔었다고 자백 같은 고백을 했다. 그랬더니 사장님 눈이 똥그래지면서, 남해와 부산이 그렇게 가까운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오셨냐며, 이러다 남해 정착하는 거 아니냐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여건이 되면 복작거리는 도시보다는 조용한 시골에서 살고 싶지만 시골에 와서 먹고 살 능력이 되지 못한다고 슬픈 얼굴로 농담처럼 말했다. 그렇지만 이건 사실이다. 시골에서 살기 위해서는 직업이 사람이나 일터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 아니면 농사를 짓거나. 전업 농부가 아니라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예술가 정도가 시골에 정착하는 게 좀 더 수월할 수 있을 거다(쉽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예술적 재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 하는 일자체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찾아야 하는 일이다. 이 직업을 유지하면서 시골로 이주할 순 없다. 더군다나 농사일은 못하니까 시골에 정착하려면 결국 새로운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결론. 새로운 일을 하려면 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하는데, 혼자서 그럴 수 있을까?


사장님과 몇 마디 더 나누고 나서 후식으로 먹었던 유자차를 구매했다. 남해에서 난 유자로 직접 담근 유자청이라고 한다(물론 사장님 부부가 담근 건 아니고). 꽤 많이 달긴 했지만, '그래도 겨울엔 유자차지. 생각해 보니 최근 몇 년 동안 유자차 먹은 기억이 없네. 기회가 될 때 먹어둬야지', 하며 구입했다.

이 유자청은 집에 와서 아주 잘 먹고 있다.


방정리를 하고,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나와서 카페로 갔다. 집으로 가기 전 마지막 커피 한 모금.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돌창고 카페엔 사람이 없었고, 한적했다. 앉아서 책 좀 읽다 가면 좋겠다 싶은 고요함이었지만, 내일부터 다시 또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아쉽지만 발길을 돌렸다. 아쉬운 대로 카페에서 책을 한 권 구입해서 왔고, 집에 와서 금세 다 읽었다.


돌창고 대표님이 최근에 출간하신 책. 이렇게 남해를 사랑하는 사람이 남해에 있어야지. 내가 어딜.


남해에 사흘 동안 머물면서 매일 다 각기 다른 경험을 했다. 처음엔 남해의 아침과 밤을 오롯이 혼자서 맞이했고, 다음엔 친구와 남해의 여러 곳을 둘러보며 남해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되었고, 마지막엔 남해의 여러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고 따뜻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사흘을 보내고 나니 내 마음이 너무 풍요로워졌다.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여행보다는 답사를 더 선호하는 편이라, 어디를 다녀왔다고 해서 마음에 감동이 남거나 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번 여행은 다녀와서도 오래도록 곱씹고 생각해 봤던 여행이었다.


남해에 있는 동안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무언가를 보는 시간 동안은 남해에 와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들, 내가 가진 역량들을 생각해 보면 혼자서는 남해에 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싶었다. 그냥 가끔 와서 이렇게 남해를 보고만 가도 되지 않을까. 내가 좋아하는 건 멀리만 있을까 싶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찾아올 수 있다면 괜찮은 것 같다. 멀리 있어도 좋은 건 좋은 거니까. 다만 내가 좋아하는 남해가 망가지지 않았으면 싶다. 그냥 이대로 존재해 주면 좋겠다 싶다. 그래서 여행하는 동안 덜 버리려고 노력했다. 2박을 했던 이유도 하루만 숙박을 하고 이불 빨래를 하는 건 너무 낭비 같아서 2일로 계획을 했다. 또 일회용 제품도 안 쓰려고 굳이 집에서 텀블러와 용기와 보냉백을 챙겨가기도 했다(덕분에 짐이 많아졌지만). 물론 이런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말이다.


텀블러엔 커피를, 용기에는 디저트를 남아서 남해친구 집에 갔었다.

한편으론 내 마음이 시골이라는 지역을 식민지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지역과 지역민의 발전보다는 그냥 내가 좋으니까 내가 원하는 그대로 있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큰 거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 이유로 지자체의 '한 달 살기 체험'을 무척이나 비판적으로 보는데, 정작 내가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좋다고 와서 먹고 쓰고 버리고 가버리는 게 식민지를 대하는 제국주의 방식이 아니고 뭐겠나 싶은 생각이 조금 들었다. 내가 늘 서울의 지방착취를 비판하면서 내가 그러고 있는 거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남해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남해가 지역민들 필요에 따라 성장하는 것이 남해가 존재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좀 했다. 내가 남해를 좋아하는 만큼 남해와 남해 지역민들의 삶에 대해서 좀 더 관심을 가져야겠다. 물론 가고 싶은 마음은 조금 견뎌서 남해에는 내 마음보다는 조금 덜 방문하고 말이다. 멀리 있어도 좋은 건 여전히 좋고, 좋으니까 멀리 있어도 여전히 좋으니까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남해에서 친구 사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