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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신 Jul 10. 2024

뫼비우스의 띠는 존재한다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서평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모든 것의 대립을 다룬다.


소설이지만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40~50년 전의 소외된 도시 노동자들, 갈 곳 잃은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반영한 현실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화적이다. 난장이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대표성을 가진다.


어떤 인물들은 이름도 없이 단순히 동생의 친구로 불린다. 그렇기에 거리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인물들이 겪는 일련의 사건들, 담담한 어조, 두서없는 대화들을 통해 책을 읽는 내내 먹먹함을 느꼈다.

절제된 슬픔 안에 있는 깊은 고통이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어서일까.


시기적으로 <칼날>이 가장 먼저 쓰인 작품이지만 난장이 연작의 시작은 <뫼비우스의 띠>다.

아마도 <뫼비우스의 띠>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굴뚝 청소 일화와 뫼비우스의 띠로 이루어진다.


굴뚝을 청소하는 아이 둘이 있었다.

청소가 끝난 후 한 아이의 얼굴을 새까맣게 변했지만 다른 아이의 얼굴은 깨끗했다.

교사는 질문한다. 누가 세수를 할 것인가?


첫 대답은 '얼굴이 새까맣게 된 아이만 세수를 한다'였다. 

하지만 이는 반쪽짜리 대답이며 대립을 의미한다. 상대방의 얼굴은 보지도 않은 채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대답은 '상대방의 얼굴로 자신의 얼굴 상태를 예상하기 때문에 얼굴이 깨끗한 아이만 얼굴을 닦는다'였다.

이 또한 반쪽짜리 답이며 이는 기만이다. 얼굴이 더러운 아이는 얼굴이 깨끗한 아이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착각에 빠져 얼굴을 닦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답을 내리는 대신 문제의 설정 자체를 비판한다.

똑같이 굴뚝 청소를 했는데 한 사람의 얼굴만 까맣게 그을린다는 것이 가능한가?

앞서 나온 두 대답은 우리의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대립과 기만들.

그리고 마지막 비판에서 본질의 문제가 대두된다.


'애초에 이것이 옳은 일인가?'


뫼비우스의 띠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는 앞면과 뒷면의 구분히 확실하게 존재한다.

잘 사는 자와 가난한 자, 사용자와 노동자, 난장이와 우물을 파주는 사람.. 

큰 틀에서 이들은 거인 부류와 난장이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물론 이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물리적으로는 만날지 몰라도 분리된 영역에 존재한다.


하지만 종이가 꼬이고 끝과 끝을 붙이면 앞면과 뒷면의 구분이 사라지게 된다.

이 대립된 영역의 존재들이 만나고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바로 이 접점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삼 남매의 아버지인 난장이는 열심히 일하고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잃은 존재다.

또한 수많은 권리를 빼앗기고도 의무만을 강요당하는 존재다. 억압당하고 핍박받는 존재다.

난장이 가족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끼리를 때우지도 못한 채 밤낮으로 일하지만 최저시급도 받지 못한다. 이들의 소박한 꿈들은 거인들의 발에 무참히 짓밟히는 경우가 다반사다.


반면 거인들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추구하려는 집단이며,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으며, 인간의 귀천을 믿는 자들이다. 이들은 법을 어기고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그들의 인권을 유린한다.

이 두 집단의 구분은 명확해보인다.


하지만 종이가 꼬이고 끝과 끝이 만나면서 구분은 모호해지고 다양한 유형의 인간 군상이 드러난다.

그곳에는 명희나 신애 동생의 친구처럼 거인에게 타협하거나 굴복하는 부류도 있다.

윤호와 경훈의 사촌처럼 거인들의 입장에서 난장이의 아픔을 이해하고자 하는 부류도 있다.

경애처럼 '생활 전체가 죄'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거인의 부류도 있으며

본인들의 몫을 빼앗기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장님 같은 난장이 부류도 있다.

지섭과 신애처럼 난장이들을 도와 투쟁하는, 어쩌면 그들도 일종의 난장이인 부류도 있다.


난장이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난장이는 죽었고 아들인 영수도 재벌 총수의 동생을 죽인 죄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고 난장이들은 여전히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가시고기들이 그물을 뚫고 경훈의 살점을 찢었지만 꿈일 뿐이다. 두 집단은 화해의 단계로 가지 못했다.


왜 대립의 유지는 계속되는 걸까?


그것은 우선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경훈이 재판장에서 했던 발언을 통해 우리는 거인들이 그들만의 틀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법을 어기고, 제대로 된 봉급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국가의 경제에 기여하고, 노동자들을 구제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경애처럼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것들을 누리며 사는 수동적인 인간도 많다.

난장이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굴뚝 청소의 세 번째 답이자 물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이 시스템이 옳은 것인가?'라는 비판의식이 없다면 영수와 지섭의 외침은 작은 몸짓에 지나지 않은 채 소멸할 것이다.


두 번째는 사랑의 결핍이다.

사랑의 결핍은 거인에게서 도드라지게 나타나지만 난장이들의 투쟁방식도 결국 살인, 폭행 등으로 이루어지며 사랑이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만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기에 양쪽은 하나가 되지 못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입체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양측 모두 계몽과 사랑이 필요하다. 그러나 먼저는 거인의 부류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거인들은 가해자이며 난장이들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난장이들이 겪은 아픔들이 너무도 생생하고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난장이들의 몫을 가로챘고 난장이들에게 빚을 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랑과 계몽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야 한다.


그러나 갑자기 사람의 의식이 급격하게 변하거나 사랑이 샘솟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장이들은 계속 투쟁하고 싸우고, 버티며 이들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언젠가는 세상이 변할 것을 기대하며, 난장이들이 세상을 바꿀 것을 기대하며 말이다.


소설의 머나먼 결말을 나는 예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집필된 시기와 비교할 때 난장이들의 꿈틀거림은 세상을 점차 바꿀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느낀다. 

아직도 난장이는 많으며 이들은 투쟁하고 있다.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생계를 위해, 그리고 이상을 위해.


현재를 살아가는 난장이들 또한 결국엔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난장이가 고친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듯이.

곱추, 앉은뱅이와 함께 질기게 살아남은 개똥벌레처럼.

난장이의 작은 공이 잠시나마 하늘을 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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