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앙큼대마왕 Mar 07. 2023

아카데미를 점령한 베트남 배우들

올해 3월 개최되는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배우 양자경이 주연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하 ‘에에올’)>가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 총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세상의 관심사는 말레이시아 출신의 양자경이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쥘 수 있을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 살고 있는 1억 명의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각기 다른 작품으로 남녀조연상 후보에 나란히 오른 두 명의 베트남계 배우들의 수상 여부가 최대 관심사이다.

<에에올>로 골든 글로브 조연상을 수상한 꾸안 께 후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꾸안 께 후이 (Quan Ke Huy)는 영화 ‘에에올’에서 양자경의 남편역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관객들과 평단 모두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이에 더해 지난 1월 80회 골든글러브 남우조연상을 포함해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이미 40차례 수상해 이번 아카데미에서의 수상 역시 기대되고 있다. 40대 이상의 한국인이라면 추억의 영화 <구니스>, <인디아나존스 2>에 출연했던 동양인 꼬마 아이를 기억할 텐데 꾸안 께 후이가 바로 그 아역 배우이다. 꾸안 께 후이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에서 아역 스타로 데뷔했지만 80~90년대 아시아계 배우가 마땅히 설 자리가 없었던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조감독, 무술연기 지도자로서 영화계에서 인연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다 아시안계 감독과 배우들만 이루어진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3주 연속 북미 박스 오피스 1위를 하고 제작비의 7배에 달하는 2억 달러의 수익을 거둔 대흥행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얻어 다시 영화계에 데뷔해 성공했다.

2023 영국 아카데미상 수상식장에서의 Hong Chau_출처 tomandlorenzo.com

영화 <더 웨일>로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홍 짜우는 (Hong Chau)는 이미 몇 년 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실력파 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명배우이다. 2018년 영화 <다운 사이징>으로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으며 75회 골든글로브 여우조연상 후보와 미국배우조합상(Screen Actors Guild Awards)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번 아카데미상 3개 부문에 후보를 올린 <더 웨일 (2023)>과 함께 1년 사이에 연달아 개봉한 영화 <더 메뉴 (2022)>, <쇼잉 업 (2022)>에서 모두 인상 깊고 매력 있는 조연을 펼쳐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있다. 말 그대로 요즘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배우이다. 훌륭한 작품과 명품 연기에도 불구하고 유력한 여우주연상 후보와 남우조연상 모두 아시아인들인 데다 2022년 아카데미에서 한국의 윤여정 배우가 여우조연상을 수상한터라 텃세 심한 아카데미가 여우조연상까지 2년 연속해서 아시아인에게 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연달아 상영 예정인 홍 짜우의 작품들과 그 연기력을 감안하면 조만간 다시 한번 아카데미에서 수상 경쟁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꾸안 께 후이와 홍 짜우의 삶은 그들이 출연한 영화만큼이나 극적이다. 두 사람 모두 전쟁직 후 베트남을 탈출한 피난민 출신들로 꾸안 께 후이는 1978년 6살 때 가족들이 베트남을 탈출해 말레이시아, 홍콩 피난민 수용소에 지내다 미국으로 옮겨가 정착했다. 홍 짜우 부모는 1979년 베트남을 탈출해 태국 피난민 수용소에서 홍 짜우를 낳았고 이내 미국으로 옮겨 갔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피난민들이 미국 최고의 영화배우들이 된 것 자체가 대단한 드라마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들의 드라마와 같은 인생보다는 선진국에서 거주하는 개발도상국 출신 이민자들의 성공을 통해 해당 국가들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더 흥미롭다. 개도국 출신 이민자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해당 개도국의 발전 가능성에 대한 연관 관계나 특별한 이론을 통해 증명된 것은 아직 없어 보인다. 하지만 힘겨운 이민 생활이라 하더라도 한국인, 중국인, 인도인들처럼 특정 국적의 이민자들 중에는 미국처럼 좋은 사회경제 환경과 능력에 따른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특정 개발도상국 출신의 이민자들의 모습을 통해 해당 개발도상국의 발전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할리우드에는 꾸안 께 후이나 홍 짜우 이외에도 인기 영화에서 훌륭한 역을 소화하고 있는 배우들이 꽤 있다.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조연과, <라야와 마지막 드래건>의 주인공이었던 켈리 마리 짠 (Kelly Marie Tran) / 역시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 조연과 베트남 영화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서 개봉한 <퓨리에>의 주인공 베로니카 응오 (Veronica Ngo) / <엑스맨 : 아포칼립스> 조연과, 넷플릭스 시리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의 주인공 라나 콘도르 (Lana Therese Condor) 등이 명배우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펼치고 있다.

베트남 사상 최대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 <Nha Ba Nu>

베트남 국내 영화계도 한국의 든든한 자본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다. CJ EMM이 제작한 <Nha Ba Nu (냐 바 누. 누의 가족)>가 베트남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 영화는 2월 17일 현재, 개봉 24일 만에 4,500억 동 (한화 250억)의 매출을 기록하며 4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고 있다. 3월 3일부터는 CJ엔터테인먼트 배급을 통해 미국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플로리다 등 미국 곳곳에 개봉한다. 이 영화는 베트남 영화사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1) 그간 베트남 영화 흥행 기록 대부분을 차지하던 할리우드 영화들의 흥행 기록을 모두 깨뜨렸다는 것

2) 그간 역대 흥행 베트남 영화의 대부분은 한국 영화의 리메이크작이었는데 이번에는 순수한 토종 베트남 콘텐츠라는 것

이다.

베트남 본연의 이야기로 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2021년 12월 개봉한 <Bo Gia (보 쟈, 늙은 아버지)>는 4,269억 동 (한화 235억 원) 매출을 기록하며 베트남 영화로는 사상 처음으로 관객 400만 명을 동원했다. 하지만 당시 베트남은 코로나 펜데믹으로 1년 넘게 지속된 상영과 운영 금지가 풀린 직후라 관객들이 영화에 굶주려 있었다. 게다가 스크린을 경쟁할 할리우드 대작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훌륭한 흥행 성적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 세계적으로 흥행 돌풍을 일으킨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들이 상영하는 속에서 베트남 영화가 할리우드 대작들을 누르고 사상 최고의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게다가 작년 흥행 대작 <보 쟈>의 주인공이었던 쩐 탄 (Tran Thanh이 이번 <나 바 누>에서도 주인공이다.

전 세계적으로 K-콘텐츠가 대유행이지만 머지않아 V-콘텐츠가 유행할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자본력과 기획력이 베트남계 할리우드 배우들과 베트남 현지의 감성 넘치는 배우들이 함께 큰 일을 저지르지기를 가슴 벅차게 기대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