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일 미국외교 전문지 <Foreign Policy>에는 한반도의 전쟁 발발 위험을 경고하는 기고문이 실렸다. 해당 글은 최근 북한이 통일 정책을 포기하고 핵무기와 이를 탑재할 수 있는 미사일 능력을 크게 강화한 것을 우려했다. 또한 올해 1월 김정은 위원장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언급한 것을 두고 군사 충돌 가능성도 제기했다.
여기에 더해 북한은 남북 간 회담이나 교류사업, 경제협력을 담당해온 관계기관을 폐지하며 소통 창구를 없애 버렸다. 한국 정부 역시 정권 출범 때부터 대화 보다는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견지해오고 있어 남북 관계는 심각한 긴장 상황이다. 과거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북한을 달래주는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그럴 여력이 없다. 미국과 EU 역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로 한반도에 신경 쓸 틈이 없다. 마주 보고 달려드는 기차 같은 남북 관계에 중재자가 필요한 상황에서 어쩌면 베트남이 남북 문제를 풀어 줄 해결사가 될지도 모른다.
베트남은 북한의 정치·경제·외교적 롤모델
2019년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가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낙점된 되에는 북한이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을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거슬러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도보 다리 회담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베트남식 (개혁개방) 모델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베트남의 유명한 경제학자이자 개혁개방 실현에 중요한 역할을 한 Le Dang Doan은 (레 당 도안)은 2019년 2월 CNBC와의 인터뷰를 통해 ‘북한은 지난 3년간 베트남의 개혁 개방을 공부했다’라고 밝혔다.
북한은 진작부터 베트남 엘리트들인 김일성대학과 김책공대 학생들을 대상으로 베트남의 개혁개방 정책을 배우게 했다. 베트남 고위 공무원이 북한으로 직접 가서 강의도 하고 북한 고위관계자들과 대학생들이 베트남으로 직접 가서 배웠다고 한다. 베트남은 시장 개방과 해외 자본 유치에 적극적이면서도 공산당의 권력은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정치 체제를 유지하고 싶은 북한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이상적인 롤모델이다. 무엇보다 중국에 종속되기를 극도로 경계하는 북한과 베트남의 공통점이 김정은 위원장에게 베트남식 개방 모델은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10년 넘게 전쟁을 한 철천지원수였던 미국의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수용하고 관계 개선을 통해 빠른 경제 성장을 하고 있는 베트남의 경험도 전수 받고 싶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베트남은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롤모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력 도발보다는 개혁경제가 북한이 살 길이라는 것을 진실되고 신뢰성 높게 조언해줄 수 있는 존재는 베트남 밖에 없다.
베트남은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미국의 경제 보복은 가혹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은행과 IMF의 회원국이 되었지만 베트남은 어떤 세계 기구로 부터도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게다가 1978년 캄보디아 침공과 이를 빌미로 중국과 전쟁까지 치러야만 했다. 베트남이 지금은 세계 1~2위를 다투는 쌀 수출 국가이지만 1988년까지만 하더라도 쌀이 부족해 300만명이 기아에 허덕여야만 했다. 내부적인 논란 속에서도 베트남은 개혁개방을 결단하고 자신들이 살고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국제 사회 요구에 따라 10년 동안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10만명의 베트남 군대도 과감하게 철군했다. 수용하기 어려운 많은 것들을 베트남은 받아 들이고 세계 무대에 나섰다. 1989년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베트남 화폐 가치 폭락으로 1인당 국민 소득은 96달러에 불과했지만 2023년 기준 4347달러로 35년 동안 450배 성장했다. 지독하게 전쟁을 치루었던 미국과의 교역액도 1995년 4억 5100만 달러에서 2023년 1240억 달러로 276배 성장했다.
지난 30년간 연평균 성장률 6~7%의 고성장을 이룬 베트남과 달리 북한은 1988년 1인당 GDP 1000 달러 내외에서 2023년 현재는 500달러 미만으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1차 북미정상회담 직후 당시 폼페이오 미국무부장관이 평양을 방문하고 곧바로 도착한 하노이에서 ‘북한이 미국과 관계 개선을 한 베트남식 개혁개방을 따르면 ‘기적’같은 경제 성장이 재현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과 미국 모두 베트남식 개방 모델에 합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였던 존 볼튼의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2019년 6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깜짝 회담을 하며 다시 물꼬를 틀 수 있었지만 코로나 펜데믹과 트럼프의 재선 실패로 모든 것이 허망하게 끝나버렸다.
베트남, 남북 양쪽과 우호적인 관계
하지만 한반도 문제 당사자인한국과 북한은 끝까지 포기하면 안된다. 남북 관계가 극단적인 관계까지 치닫고 양쪽이 대화하기 어렵다면 베트남을 통해 중재하며 관계 개선을 시도해야만 한다.
베트남 입장에 한국은 지난 30년간 누적 외국인 투자 1위 국가이다. 9000여개의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 있고 20만명의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살고 있다. 사돈의 나라라 불릴 정도로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한국에 정착해 있고 한국에도 베트남 사람이 20여만명 살고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이다. 전세계에서 한국과 북한 양쪽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연결되어 있는 나라도 드물다.
최근 북한이 베트남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남북문제에 있어 베트남의 역할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24년 3월 15일 김성남 북한 노동당국제 부장이 대표단을 이끌고 베트남을 방문해 Le Hoai Trung (레호아이쭝) 베트남 공산당 대외부장과 회담을 했다. 양국 상호 관계 발전을 위한 민간 교류 협력이 주요 의제였지만 전쟁도 불사한다는 북한의 움직임에 전세계가 주시했다.
8월 12일에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5년동안 비어 있던 주하노이 북한 대사로 리성국이 임명되어 또럼 당서기장겸 국가 주석에 신임장을 제출했다.
9월 9일에는 박상길 북한 외무부 부상(차관)이 베트남을 방문해 타이썬 외교부총리와 회담을 했다.
9월 18일 베트남 황쑤언치엔 국방부 차관과 베트남 공산당 중앙위원, 중앙군사위원 등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해 북한 국방성 김민석 부상(차관)과 회담했다.
눈에 띄는 것은 지난 8월 15일 베트남 국영방송 VTV의 ‘북한이 올 해 말 외국인 대상 관광을 재개한다’는 보도였다. 또다른 베트남 언론 Vietnamnews는 ‘스키장이 있는 삼지연을 포함한 북한 전역’이 대상이며 베트남 여행사들은 2025년부터 북한 관광 고객 모집을 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북한이 동맹국 베트남 국민들을 상대로 관광객 모집 한다는 것이 앞뒤가 안맞다.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소리 높이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자신들에 대해 관심을 갖어달라는 울부짖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