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트럼프 2.0 - 혼란스러운 아세안

지난 1월 14일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열린 미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장관지명자는 ‘아세안이 몇 개 회원국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하지 못해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image.jpg 아세안에 대해 무지한 피트 헤그세스 국방부장관 지명자가 아세안 회원국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세안 회원국들은 단순하게 웃고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조만간 미국에 패싱 당할 아세안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과거 트럼프는 1기 체제(2017년~2020년)동안 아세안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트럼프는 2017년 11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 정상회담에 처음으로 참석한 이후 아세안 회의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체로 대통령이 참석하지 못하면 부통령이나 국무부장관이 대신 참석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런데 2019년 태국에서 열린 아세안회의에서는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대신 보냈다. 이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 7개국 정상은 미국과 회담에 불참하며 강하게 불만 표시를 하기도 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있는 아세안 본부에 주재해야하는 미국 대사 역시 트럼프 임기 내내 임명하지도 않아 노골적으로 아세안을 외면했다. 트럼프는 왜 이렇게 아세안을 무시했을까?


싱가포르의 싱크탱크인 유소프 이삭 동남아시아연구소는 트럼프 2.0 체제를 앞두고 아세안 전문가 6명과 함께한 ‘트럼프 복귀와 아세안-미국 관계에 대한 대담’ 내용을 지난 1월 2일 공개했다. 이 자리에 모인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자주의 협정보다는 양자 협정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여러 나라 연합체들과 공동으로 협상하기 보다는 각 나라 개별로 협상해서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들 전문가들의 말처럼 트럼프는 아세안 집단 공동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개별 국가 ‘베트남’과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교류를 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역사적으로 아세안에서 중국과 가장 대척점에 있고 베트남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고 있는 베트남을 적극 옹호했다. 미국은 베트남 동해 영유권과 자주권을 지지하며 미해군 구축함을 중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는 인공섬 주변 12해리 이내를 항해하는 ‘항행의 자유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국제 해양법에 의해 이 지역이 중국의 영토가 아닌 국제 수역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U.S.-donates-patrol-vessel-to-boost-Vietnams-maritime-security.jpg 미국이 베트남에 제공한 해안경비정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베트남의 해상 안보 역량 강화를 위해 길이 115m의 3250톤급 고속경비함과 수 십척의 고속정을 무상으로 제공했다. 또한 통신 장비, 해양 탐색 레이더 및 감시 시스템, 정찰 드론 등을 베트남 해군과 해경에 제공하고 각종 훈련도 지원했다.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교류 절정은 2018년 3월 미항공모함 칼빈슨호의 다낭 정박이었다. 1975년 미국과 전쟁이 끝난 이후 미항공모함이 베트남 영토에 입항한 것은 처음으로 미국과 베트남의 군사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베트남과 중국이 동해(남중국해)에서 영토 분쟁을 겪으면 미항공모함전대가 개입할 수 있다는 무력 시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2020년, 2023년 미항공모함은 정기적으로 다낭에 입항하고 있다. 미국은 경제적으로도 베트남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트럼프는 베트남을 미중 무역 전쟁의 대안 시장으로 낙점했다. 베트남은 트럼프의 미중 갈등으로 가장 큰 경제적 수혜를 입었다. 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들이 미국의 대중국 보복 관세를 피해 베트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이다. 베트남의 미국과의 무역 규모는 꾸준히 늘고 있었지만 트럼프 집권기인 2020년 처음으로 미국의 10대 교역국으로 등극했다. 트럼프는 대미 무역 흑자국들에 보복 관세 폭탄을 때렸지만 베트남은 언제나 대상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받아왔다.


24년 10월 10일 라오스에서 열린 아세안과 중국의 정상회담_출처 ASEAN 페이스북 페이지.jpg 중국 리창 총리가 아세안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기념 촬영 중


반면 트럼프와 달리 바이든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아세안 전체와 적극 손잡았다. 바이든 행정부 임기 첫해인 2021년의 아세안은 뒤늦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감염 우려가 극심했음에도 미국은 적극적으로 아세안 끌어안기에 나섰다. 2021년 7월 오스틴 미국방부장관은 싱가포르-베트남-필리핀을 연달아 방문해 미국과의 군사 협력을 강화했다. 이어 8월 해리스 부통령이 연달아 싱가포르-베트남을 방문해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각종 방위 협력을 체결했다. 12월에는 블링컨 국무부 장관이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를 연이어 방문하며 트럼프 때 불편해진 아세안 주요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공을 들였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러한 외교 활동을 바탕으로 2022년 2월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하며 ‘아세안이 지역 내 정치, 경제, 안보 협력의 중심축임을 존중하겠다’고 명시했다. 경제적으로는 아세안이 중국에 집중된 공급망의 일부를 대체할 곳으로 인정하고 지속가능한 경제 성장을 위한 협력을 약속했다.


이와 함께 아세안 지역의 기후 변화 문제에 대응할 수 있도록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청정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게 지원책을 제시했다. 21년 ‘미국-아세안 기후 미래 이니셔티브’ (1억 200만달러)를 시작으로 ‘클린 파워 아시아 프로그램(7억 5천만달러)’ ‘아세안 인도-태평양 포럼(30억달러) 등 다양하고 큼직막한 선물 보따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하지만 트럼프 2.0체제가 시작되며 아세안 대한 기후 협약 지원은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 연설에서 ‘국가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화석 연료 인프라 개발을 가속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취임식이 끝나자마자 첫 행정명령으로 파리기후변화 협정에 다시 탈퇴한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트럼프는 2017년에도 파리기후변화 협정에 탈퇴하며 청정에너지를 노골적으로 부정했었다. 이제 미국의 지원으로 아세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태양광, 풍력과 같은 청정에너지 사업이 불투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임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단장된 백악관 메인 페이지_출처 미국백악관 홈페이지.jpg


트럼프 2.0체제에서 예상 밖의 미중 화해 분위기는 아세안에 안도와 위기감을 동시에 주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의 취임식에 시진핑 중국 주석을 초청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틱톡 금지 유예와 같은 상징적인 조취를 취했다. 1월 18일 월스트리트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취임 100일 이내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고까지 말하며 적극적인 화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아세안의 앞마당인 남중국해에서 안정감을 줄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아세안이 미국과 중국의 주요 정책에서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간 미중 갈등 속에서 부각된 아세안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감소될 수 있다. 또한 그간 미중 양국으로 받아왔던 경제적, 외교적 지원은 대폭 축소될 가능성도 높다. 트럼프 2.0체제 아세안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다음 회에는 트럼프 2.0시대 아세안 각국의 대응과 변화된 정책을 다룬다.


@트럼프 #트럼프 @아세안 #아세안 @베트남 #베트남 @ASEAN #ASEAN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벌금 폭탄, 교통사고와 전쟁에 나선 베트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