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본 첫 줄에 대한 아빠의 대답
사고가 아니라 지켜진 존재
주민등록초본을 처음 출력할 때,
끝도 없이 나오는 종이에 시선을 멈추고 프린트를 바라봤다.
자취 시절 이사를 많이 다녀서 많이 나오나 보다 했다.
제일 첫 장이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프린트의 특성 덕에
무사히 출력을 마치고서 확인했다.
내 초본의 첫 장 첫 줄에는
(사유: 출생신고) OO의 자녀가 아니라
(사유: 출생신고) OO의 동거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의 기저,
내 마음의 심연 어딘가에는
나라는 존재는
사랑을 근간으로 이뤄진 생명이 아닌
원치 않는 사고로
우연하게 만들어진 피조물이었다.
늘 마음 한편,
내 시작이
기다림보다는
어쩌면 우연에 가까웠다고 생각해 왔다.
태어난 지 2년이 훌쩍 지나
아빠의 자녀로 등록되지만,
다시 엄마의 자녀로 3번을 따라다니다가
초등 2학년 여름, 드디어 세대합가.
다시 아빠의 자녀로 등록돼 있다.
아, 이토록 어지러울 수가!
아빠와 저녁 식사 후 술 한잔 하며 여쭈었다.
"나는 왜 할아버지 동거인으로 출생신고가 되어있어요?"
"그리고 왜 몇 번이나 주소가 바뀐 거예요"
제법 비장하게 물은 나의 심경과는 다르게
돌아온 대답은 별거 없었다
.
나를 낳고 그 해 여름 결혼식을 올렸고,
주소지는 왜 그런 건지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나의 시작은,
생각했던 것처럼 우연한 사고는 아니었다.
그들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함께였다고 했다.
그리고 나보다 먼저 찾아왔다가
떠난 생명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다시 찾아온 생명을 잘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지켜지려 했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