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 남은 그림자(08) 아빠, 너머의 사람

망나니 둘째 아들이 배를 타서 번 돈의 행방

by 안밖


역할과 존재

명절이었다.

아빠가 우리 집으로 왔다.


밥을 먹고, 술을 꺼냈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아빠의 옛이야기를 듣는다.

둘째 고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셨는데,

다른 누이도 있었다고 말하셨다.


"원래는 7남매였다.

둘째 누나와 큰 형 사이에 셋째 누나가 있었는데,

아주 아기 때 잘 못 됐다이가.


그래서 6남매가 됐다."




"에구, 애기가 안 됐네. 아빠는 얼굴도 모르겠네?"


"모르지"



한창 잘 나가던 할아버지의 사업이 40대에 꼬꾸라졌다.

10살 이상 차이나는 막둥이의 건사와 부모님의 생계를 위해 생업 전선으로 뛰어들었다.


아빠는 젊은 시절 배를 타서 번 돈도

큰아빠가 사우디에 가서 벌어온 돈도

(시집간 큰 고모를 제외한)

남은 가족들을 위해 다 쓰였다.


아빠는 젊은 시절 집안에서

'망나니 둘째' 역을 맡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그 망나니의 돈을

망나니가 시킨 대로 쓰지 못하고

생계와 빚을 갚는데 쓰여서 소마소마 해하셨나 보다.


배에서 내려 집으로 가니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방으로 들어오라 이르신 뒤

한참을 담배만 태우셨단다.


"편하게 말씀하이소. 무슨 일인데요?"


"둘째야,

니가 큰 형 집 사주라고 보낸 돈이랑

동생이랑 제수씨 집 사주라고 보낸 돈을


우리가 빚 갚느라 다 썼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대답에 할아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 우셨다.


"고맙다. 고맙다."


할아버지의 눈물을 회상하다가 이번엔 아빠가 울컥했다.


그때의 당신 아버지처럼 눈물을 삼키신다.

그러라고 보낸 돈인데, 정말 괜찮았다고 하셨다.


'나'보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안위가 우선이던

시대를 살던 사람의 이야기.


그 시절, 누구나

가족이 먼저였다.





나는 꽤 오랜 시간 아빠를

'아빠답게 살아야 하는 사람'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역할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그날 들은 이야기는

그가 어떤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조금 보여주었다.


내가 보는

그 사람의 '역할' 하나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지금의 아빠는

그때의 아빠와도 다르고,


내가 기억하던 아빠와도

전혀 같지 않다.


그래서 나는

조금 다르게 보려고 한다.


지금

내 눈앞의 사람 그대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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