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아이와 함께 늙어가기
사소한 것에도 금방 미소 짓던 순수한 어린 시절을 지나, 성인이 되고 싶은 갈증과 책임지고 싶지 않은 아이 같음이 서로 저항하는 시기를 지난다. 열아홉쯤 되면 드디어 스물이 된다는 사실에 보통의 경우 설레고 기대된다. 어른의 지시에서 벗어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당당히 한 사람의 성인으로 목소리 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며 스무 살, 20대를 맞이한다.
찬란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고 나는 그대로인데, 여전히 철부지인데 서른이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온다는 것에 공포감을 느낀다. 자꾸 땅 아래만 쳐다보게 되는데, 서른 그 녀석은 똑바로 나를 응시하며 점점 커져 이윽고 나를 덮쳐 나와 하나가 된다. 서른이 되어도 여전히 열아홉의 나와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우왕좌왕 시선을 어디에 고정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마흔은 더 날카롭게 훨씬 빠르게 나를 집어삼킨다.
내가 열아홉에 상상하던 서른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막연히 스물에 상상하던 마흔은 이게 아니었는데. 열아홉의 영혼이 마흔 살 몸에 갇혀버렸다. 육신은 손 쓸 틈 없이 노화되어 가고, 하루하루 거울을 볼 때마다 다르다. 운동을 잠깐이라도 등한시하면 몸도 마음도 무너져가는데 그 속도가 무서울 정도다. 이렇듯 나이가 듦의 슬픔은 비단 육신의 노화뿐만이 아니다. 내 정신과 육신 사이의 괴리에서 오는 비극이 더 슬프다.
"나는 아직도 이팔청춘"이라는 60대 넘은 노인의 말을 더 어릴 땐 주책바가지에 때론 추태라고도 생각했다. 30대가 넘어가 보니, 그도 나와 별다를 것 없이 늙어가는 육신에 갇혀버린 20대의 영혼이었다.
때때로 성공리에 영혼과 육신이 함께 늙어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도 육신이 더 빠르게 나이 들어가겠지만, 무던한 노력으로 영혼 역시 익어가는 벼처럼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사람들 말이다.
육신과 영혼의 나이 차가 좁혀지면 나의 이 노화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의 영혼은 몇 살인 걸까? 영혼엔 어떤 양식을, 어떻게 먹여줘야 기쁘게 여길까? 내 내면에서 아이로 멈춰버린 녀석을 적어도 마흔의 내가 느끼기에 늦둥이 동생 정도로 끌어올리려면 무얼 해주면 좋을까?
해서 내면의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기로 했다. 끽해봤자 12살 남짓일 아이를 위해 그림책으로 보듬기로 했다.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가 붙은 가짜 청바지에 속상해하고 있을. 어른스러운 또래에게 항상 밀리던 그 아이. 무리의 주인공은커녕 매번 단짝 둘의 주변인 3, 주변인 4로 머물던 아이. 언제나 냉기가 흐르던 집에서 외로이 얼음 위에서 몸을 웅크리던 그 아이. 먼 옛날 학교폭력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방구석에 숨어버렸던 상처투성이인 그 아이.
이것은 그 아이에게 매일매일 보내는 러브레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