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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ug 17. 2022

INFJ 엄마의 1박 2일 나 홀로 서울 여행(2)

안 왔으면 어쩔 뻔..! :)

전날 부린 진상(!!)에 비해선 다행히 잠을 설치지 않고 잘 잤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 기차역에 도착했다. 정작 둘이 함께 보낼 1박 2일은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아이는 남편을 잘 따르고, 남편은 야무지다. 그리고 나와는 달리 기동성이 있으니 무더운 여름날이라도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의 폭이 더 클 것이었다. 하다못해 아이가 좋아하는 트랙터를 보러 시골길 드라이브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대략 3년 만에 타는 기차였는데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너무나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이라 조금은 낯설 줄 알았지만, 내 몸은 뭐랄까 알아서 척척 움직이고 있었다. 익숙하게 자리를 찾고, 익숙하게 짐을 착착 배치하고, 내가 가장 편한 자세(의자 기울기도 어느 정도가 좋았는지 저절로 생각이 났다)로 앉아 음악을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보다 빨리 용산역에 도착했다. S를 드디어 서울에서 만날 생각에 마음이 두근거렸다.


S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만난 친구다. 같은 반이었지만 처음부터 막 친한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버스에서 만나 무슨 얘기인가를 나눴고 대화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마음이 뭔가 찌르르 통했던 건 기억이 난다. 그날의 분위기는 떠오른다. 마냥 밝지만은 않은, 어딘가 조금은 어두운, 뭔가 위로가 됐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우정이 내게는 가장 큰 자산 중 하나다. 서로의 구구절절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이가 있다는 것,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상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것, 함께 나이 들어가며 이 관계를 더욱 소중히 여긴다는 것, 정말 감사한 일이다.


 서로의 못나고 찌질한 면도  알고 있다. 30대에 들어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빠져 마음을 가까이 나눌 수는 없는 공백기도 있었지만,  시간을 지나 지금 다시  새로운 단계에서 변화된 생각과 마음을 나눈다. 너무 귀한 일인  안다. 나와 아주 많이 비슷하고, 아주 많이 다른 그녀를 좋아한다. 생각하면 깔깔 웃을 생각에 기분이 좋다.


아무튼 S는 카카오프렌즈 팝업스토어 앞에서 있었다. 밖에는 소나기가 같은 비가 이제 막 본격적으로 뿌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우산이 없었다. 3년만의 서울 풍경에 내가 잠시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 S가 민첩하게 움직여 택시 줄에 자리를 잡았다. 다행히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예술의 전당이요,라고 말하며, 택시 타고 전설의 고향이요, 하면 예술의 전당에 데려다준다는 예스러운 농담을 속으로 떠올리며 내게는 나름 고향의 전설 같은 예당에 도착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1101 어린이 라운지를 둘러본 건 처음이어서, 나중에 아이랑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일단 가장 중요한 거, 먹어야 했다. 나는 방전이 되면 손이 떨리기 시작한다. 일단 더 큰 허기가 오기 전에 배에 뭔가를 채워야 한다.


비타민 스테이션을 지나 야외로 나오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분수 소리가 어우러져 기분 좋은 울림으로 들려온다. 아이랑 꼭 같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집 앞 공원의 분수를 무척 좋아하는데, 여기도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졌다. 어쨌거나 배가 고프니 빨리 자리를 잡아 주문 먼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날이 생각보다 많이 덥지 않고, 적당히 구름이 있어서 야외 테라스에 앉기로 했다.



음식을 주문하고 비로소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와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전날 내가 그토록 걱정하고 망설였나 싶을 정도로, 안 왔으면 어쩔뻔했나 싶을 정도로 좋았다. 적당히 좋은 날씨에 적당히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적당히 서로의 사진도 찍어주면서, 마치 ‘예전처럼’ 자유로이 앉아 수다 떠는 시간. 와우 얼마만인지. 둘 다 미혼이던 시절, 같이 여기저기 놀러 다니던 그 느낌 말이다.

 

커피를 마시며 오늘 관람 가능한 전시 중 뭘 볼지를 의논했다. 올라올 때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사진전을 볼 생각이긴 했는데, 검색해보니 이 전시는 10월 2일까지 하고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전을 8월 말까지 한다는 것 것을 알게 됐다. 추후에 또 올라오게 될 수도 있으니(이미 또 올라올 계획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전을 보기로 결정했다.


S와 함께 전시를 관람하니, 오랜만에 느끼는 이 기분이 뭔지 잠시 생각했다. 물론 그간에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전시회나 문학관을 몇 차례 가긴 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갑자기 울거나 소리 지를 수 도 있으니 늘 긴장 상태로 전시회를 관람했고, 떼를 쓰기 시작하면 일단 안고 급하게 나오느라 마음 편히 감상할 겨를은 없었다. 그저 한 작품이라도 보면 그걸로 위안인 그런 것이었지.


조용히 작품들을 바라보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게 왜 이토록 좋은가. 익숙한 어떤 기분을 아주 오랜만에 느끼며 순식간에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전시를 관람한다는 건 상당한 지적인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로, 감성도 사용하지만 지성도 사용한다. 내가 알고 있는 배경 지식을 활용하기도 하고, 잘 몰라서 궁금한 의문점을 기억해두고 추후에 다시 찾아보기도 하고. 전시에는 일련의 흐름이 있으니 앞쪽을 보다가 생긴 의문점들이 끝까지 집중해서 보다 보면 저절로 해결이 되기도 한다.


평소 생각해오던 어떤 것이 언어화되거나 시각화됐을 때, 즉 예술의 언어로 표현된 걸 만날 때의 짜릿한 그 기분. 더불어 나와는 다른 생각이나 관점을 마주할 때 느끼는, 기존의 틀이 깨지고 경험이나 사고가 확장되는 것이 좋다. 늘 생활하는 반경에서는 쉬이 깨닫기 어려운 어떤 것을 잠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그렇게 한 번 보고 나면 그 이후에는 일상에서도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난 이게 그토록 좋은 것이다.




 S와 전시 관람을 마치고 예약한 호텔이 있는 코엑스로 향했다. 우리는 코엑스에서 ‘너무 헤비 하지는 않게’ 저녁을 해결하고, 백화점 지하에서 ‘라이트 한’ 술과 안주를 구입하여 호텔방으로 갈 계획이었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으니 한결 더 편한 기분이 됐다. 진짜 내가 ‘여행’을 왔다는 것이 실감이 됐다. 19층을 배정받았고 숙소에 짐을 풀고 가벼운 손으로 다시 코엑스로 내려왔다. 뭐 먹고 싶냐는 S의 물음에 나는 ‘그 왜, 그 어둑한 데 있잖아, 음식점들 있는, 거기서 먹고 싶은데’라고 했더니, 이 애매한 한 마디에 S는 알았어, 따라와라며 앞장섰다. 네비박, 박네비. 역시 멋지다.


 코엑스는 여전히 거대한 미로 같았고, 나는 다음 날 오전에 혼자 영풍문고를 둘러볼 계획이었는데, 그건 포기하기로 했다. 나 같은 길치에게는 너무 큰 모험이다. 아마 나는 밖으로 나오는 것을 찾는데 한참이 걸릴 확률이 높다. 2박 정도 머문다면 해보겠지만, 내일 약속도 있으니 일정에 지장을 초래할 수도 있는 무리는 하지 않기로 했다.


S는 내가 말한 ‘그 어둑한 데’를 찰떡같이 찾아 인도했다. 점심을 브런치 스타일로 먹었기 때문에, 밤에 술 한잔 하기 위해서는 저녁은 밥으로 먹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았다.


'너무 헤비 하지는 않은’ 밥과 반찬이 나오는 식당이 있어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현대 백화점을 향했다. S는 요즘 핫하다는 버터 맥주를 찾았으나 들어와 있지 않았고, 우리는 와인과 막걸리 사이에서 방황하다 해창 막걸리 1병과 손질되어 있는 과일 조금을 구입하였다. 해창 막걸리는 조만간 해남에 있는 주조장에 놀러 가서 사 올 예정이었는데, 여기서 먼저 맛보게 됐네.


수다 떠느라 정작 야경은 찍지 못했다.


조용한 호텔 숙소에서 S와 야경을 바라보며 막걸리 한 잔 기울이는 시간은 어쩌면 이번 여행의 백미였다. 누구도, 무엇도 의식하지 않고 속 얘기를 하나둘 꺼내다 보니 시간이 술 넘어가듯 지나갔다. 모처럼의 시간이 아쉬웠지만 다음 날 출근해야 하는 S는 너무 늦지 않게 귀가했다.


홀로 남은 호텔방에서 나는 TV를 켰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슬기로운 산촌생활을 틀어놓았다. 집에서는 아이가 잠들고 난 이후에만 안방에서 조용히 켜는 데 당당하게(?) 티브이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 이마저도 재미있었다.


전날 여행을 망설일 때 떠오른 여러 가지 걱정되는 상황 중에 하나가 바로 호텔방에서 혼자 자는 것이었다(무서워..ㅠ). 역시 쉬이 잠들 수는 없었고, 방의 조명을 껐다 켰다 해보며 무섭지는 않으면서도 너무 밝지는 않은 정도의 조명을 찾아 켜 두었다. 아마도 이 상태로 선잠을 자다가 못 견디게 졸릴 때가 되면 완전히 소등하게 될 것이었다. 다행히 이른 아침부터의 긴장, 설렘 그리고 오래간만에 많은 사람들 사이에 치였던 덕분인지(예나 지금이나 기 빨리는 코엑스&현백 지하) 그리 오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새벽쯤에는 완전히 소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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