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을 좋아하지만 신원호도 좋아해
난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브런치에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의 리뷰를 썼다)를 좋아한다.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영상의 톤과 분위기, 음악, 섭외된 장소, 공간 구성의 리얼리티 등 형식까지를 포함한 전부를 세세하게 좋아한다. 신원호 연출의 드라마의 경우에는 형식보다는 내용 자체를 더 좋아하는데 그중에서 특히 <응답하라 1988>과 <슬기로운 의사생활 1,2>을 재미있게 봤다.
이 두 감독이 보여주는 세계관과 스타일은 아마 누가 보더라도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한 가지 커다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일상성’이다. 그들의 작품은 일상에 바짝 밀착되어 있는데 선택한 장소들, 화면에 잡히는 공간에 배치되어 있는 물건들, 주인공들의 대화나 사소한 행동들이 그렇다.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장면들을 포착하고 리얼하게 표현해냄으로써 핍진성을 확보한다.
이 두 감독님들이 보여주는 어마무시하게 세밀한 디테일이 좋다. 여러 번 다시 볼수록 그 진가가 드러난다. 덕분에 인물들은 납작하지 않고 입체적이게 느껴지고, 작품이 끝나도 인물들은 어디선가 계속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다. 이렇게 세심하게 정성을 기울이는 감독이라면 믿고 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장인에 가까운 사람들의 '작품'이니까. 텔레비전은 바보상자라는 얘기를 자라면서 자주 들어왔지만, 잘 만들어진 ‘TV 드라마’는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응팔>도 <슬의생>도 본방으로는 못 봤다. 응팔 방영 당시(15년 말~16년 초)에는 개인적으로 제정신이 아닌 시기였고, <슬의생 1>은 (2020년 봄) 아이를 막 조산 및 난산으로 출산했던 터라 보기 힘들었다. 신생아를 돌보느라 짬도 없었지만 그보다는 병원 이야기를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특히 산과와 소아과 내용들을(기사로는 접함) 볼 자신이 없었다. <슬의생 2> (2021년 여름)까지도 비슷한 이유로 보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 세돌이 지나고 마음에 여유가 좀 생기면서 정주행을 했다. <응팔>은 비교적 최근에 정주행을 했다.
<응답하라 1994>의 등장인물들도 대부분 선하고 투닥투닥하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설정이지만, <응사>는 <응팔>에 비한다면 로맨스 자체와 여름날 같이 싱그럽고 푸르른 청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에 비해 <응팔>은 ‘가족’과 ‘이웃’이 더 중요한 키워드인데, 혈연관계와 혈연보다 어쩌면 더 가까운 이웃 ‘사촌’ 간의 착하고 선한 마음들로 가득 찬 세계다. 여기서 청춘은 쨍한 여름의 한 복판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늦가을과 한겨울 즈음에서 돌아보는 청춘이다. 애틋하고 애달프다.
<응팔>의 따스함은 가난했던 그 시절, 아직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기 전인 그 시절 가족 간의 사랑과 이웃 간의 우정에 기반한다. 저녁 식사 때면 서로 반찬을 나누고,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도 집에 드나들며, 누가 아프면 서로 돌봐주고, 속상한 일이나 즐거운 일들을 함께 고구마를 먹으며 소주 한잔 기울이며 나눈다.
이 작품이 과거의 골목길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서로에 대한 지극히 착한 보살핌을 보여준다면, <슬의생>은 대한민국 현재의 시점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의 ‘사람 사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응팔>의 인물들처럼 선하다. ‘착하고 재미있는 프로일잘러’들이다.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과 책임을 다한다. 선하지만 똑 부러지고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기도 하는 스마트하고 성실한 사람들. <응팔>과 <슬의생>에서 가장 부러운 점은 주요 인물들이 마음 맞고 친한 사람들과 늘 가까이하며 하루의 희로애락을 나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리 친해도 나눌 수 없는 각자 몫의 슬픔과 외로움이 있다는 것도 보여주지만.
<응팔>과 <슬의생>을 최근에 다시 정주행 하다 보다 보니 신원호 감독의 인터뷰 내용이 떠오른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저 좋은 사람들 사이에 끼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는. 정말 그랬다. 이 드라마들은 나도 저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고 나도 누군가에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음의 온도가 약간 더 높아진다.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을 쓰지 않을 이유를 찾다가, 마음을 표현해 보기로 한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따스한 마음들이 돌아오기도 한다. 원래 그랬나, 나만 혼자 추운 세상에 살았나. 아닌데, 이불 밖은 무서워라고 할 정도로 세상은 차갑고 위험이 가득한데. 그래서 한참을 잔뜩 경계하고 움츠리고 살았는데.
이 드라마들은 모두 시청률이 높았지만 한편으로는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가 그리는 등장인물들의 판타지에 대한 가까운 비현실성(엘리트 직업+인성+능력+금수저), 악랄한 악역과 폭력이 없는 표백된 세계, 역사적 현실에 대한 나이브한 표현 등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에이 현실에 저런 사람이 어딨어. 누가 저렇게까지 해’.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거짓말처럼 착한 세계를 믿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착한' 세계는 더 순수하고 더 순진해서 그만큼 덜 똑똑한, 세상을 살아가는 약지 못한 마음가짐일까.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만이 더 똑똑한 것일까. 서로에 대해 만연한 불신, 경쟁, 증오, 폭력, 갈등만이 이 세계의 진실일까. 그래서 우리는 한 시도 마음 놓을 수 없이 불안해하며 의심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하는 걸까.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의 한 문장이 떠올랐다. '다시 속기 싫어서 다시 속지 않는 방법의 하나로 만나는 모든 것을 일단 불신부터 하고 보는 방법은 매우 약은 삶의 방법 같지만 실은 가장 미련한 방법일 수도 있겠다'(24면)는 내용이었다. 작가는 노모의 말씀, 폭설이 내리던 날의 택시기사님과 그다음 날 환경미화원의 에피소드를 통해 깨달은 바를 이야기한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서로를 믿는 마음과 그 마음의 교감들. 곱고 깨끗한 이야기에 작가처럼 나도 그만 나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2020), 세계사, 26면
세계를 어떤 곳으로 보느냐는 당연히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점점 자극적이고 독해지는 콘텐츠의 시대에 나는 맑고 따뜻한 물을 흘려보내려는 스마트한 노력에 한 표를 던지고 싶다. 인생은 자주 고달프고 때로 비정한데 그래도 사람 사는 맛을 보여주는, 믿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들의 기획 의도가 고맙다. 나도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기 때문이다. 따스함과 차가움 가운데 한 번이라도 더 따스함을 선택할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단 1도라도 마음의 온도가 더 높아진 세상에서 살도록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은 단지 지난 과거에 대한 향수나 현재의 판타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대안을 찾고 영향을 미치기 위함일 것이다. 어쩌면 무언가를 믿어보는 것은, 세상을 선한 편에서 바라보고 진짜로 그렇게 살아보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여러 방식 중 가장 약은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