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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May 27. 2022

내 취향을 받아줘

아내의 취향을 지켜주는 남편


그가 나를 배려한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 기꺼이 하고 적극적으로
한다. (........)
그것이 바로 사랑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을 가장
큰소리로 전하는 것이다.
- <5가지 사랑의 언어> 中 



결혼과 출산과 육아라는 험한 산과 늪을 지나며 경력이 단절되거나 유보되었다는 여성들을 많이 본다. 일과 육아를 모두 놓칠 수 없었다는 그녀들을 볼 때마다 난 마치 다른 세계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엄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랫동안 그녀들의 대화에서 이방인처럼 머물러 있었다.


스물 아홉 퇴사한 후로 번듯하게 일을 해본 적이 없다. 쥐꼬리만한 퇴직금을 받아 혼자 여행 다니고 인문학 강의들을 섭렵하며 20대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대학원 연구실이나 기업 연구소에 처박혀 있는 동안 꼭 한번 해보고 싶었던 카페 마감 알바, 편의점 알바를 하며 내가 얼마나 노동에 취약한 인간인지 태어나 30년만에 처음 알게 된 나에 관한 진실에 놀라워 하고 있었다. 돈을 받기 위해 주어진 일 앞에서 게으르고 무기력해지고 쓸쓸해지다 못해 초라한 마음이 들어 대인기피의 감정까지 느끼는 나 자신이 낯설었다. 


그렇게 서른을 맞이했다.


서른 살 봄 즈음, 서울 목동 지역의 청년 마을기업 창립자 분이 내 블로그를 보고 쪽지로 만나자고 했고, (이렇게 이 동네에서 아이도 낳고 지금껏 살게 되었다) 그 후로 이사직 제안을 해왔는데 궁금해서 그 마을기업의 감사가 되었다. 이 기업의 여러 프로젝트 중 청년교육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여기서 이태리 요리 강사로 활동하는 남편을 만났다. 본업은 한 프랜차이즈 회사에서 피자나 파스타 메뉴도 개발하고 점주들을 교육한다고 했다.


1년 정도는 연애하고 결혼하자는 남편에게 '결혼할 거면 빨리 하지 왜 질질 끄냐'고 설득해 연애를 시작한지 100일 되는 날 상견례를 했고 200일 즈음 될 때, 그러니까 내 나이 서른 살 되던 해 시월에 불금의 나이트 웨딩을 올렸다. (서른 살 가을에 결혼하겠다는 작은 버킷리스트 성취)


"얘, 돈은 우리 아들이 어떻게든 다 벌 거다. 너는 먹고 싶은 거 다 사먹고, 입고 싶은 거 사입고,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그러고 살아라. 응?"


결혼을 준비하면서 시어머님이 내 팔짱을 끼고 하셨던 말씀을 심장 깊숙한 어딘가에 잘 간직해 뒀다. 결혼생활하며 돈이 궁할 때마다 심장에서 꺼내어 주문처럼 외며 버틴다.     

 



의지적인 남자의 결혼생활


아기띠는 남편 소지품


난생 처음 만난 여자와의 짧은 연애 후 빠른 속도로 결혼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불안을 느낀 남편. 여자는 자고로 나 좋다고 좇아 다니는 남자의 구애를 받아 결혼해야 잘 산다는 이야기 따위는 절대 안 믿는 나였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그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도 (약간은) 있어 보이니 결혼을 추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청첩장을 지인들에게 전하며 짧은 연애사를 담백하게 전했더니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물어왔다. 특별히 연애나 결혼의 이상적 조건을 마치 리스트에 나열하듯 하는 이들이 더욱 궁금해 했다. 

 

결혼에 확신을 갖게 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이 남자가 대단히 의지적인 사람이라는 데 있었다.


낭만적 사랑을 표현하고 서프라이징한 이벤트로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남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해 주는 '일'과 '가정', 양쪽 모두에 죽어라 성실하고 헌신하는 종류의 인간이라는 점. 가정을 희생시켜 성취를 이루어 놓고 '희생시켜 미안하다'며 뒤늦은 말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가사와 양육을 도우면서 '회사일 하고서 이런 것까지 어떻게 하느냐'고 불평을 쌓을 이도 아니었다.


일도, 가정도, 사랑도 균형감 있게 지켜낼 남자라는 걸 한두 달의 연애로 알아볼 수 있었다. (내게 이 안목을 허락하신 우리 주님께 감사한다)


실제로 그는 그랬다.


내가 결혼 전부터 키우던 반려견 달이도 함께 신혼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강아지에 딱히 애정도 없는 사람이 아기 돌보듯 강아지를 돌보는 모습에 놀란 적 있다. 출산 후 조리원에 안 가고 핏덩이를 들고 집으로 들어와 우리 부부 둘이서 셀프 산후조리를 할 때 삼시 세끼 산모 특식은 물론, 아직 탯줄 달린 핏덩이를 어르고 재우고 씻기는 그의 투혼을 아직 기억한다. 집과 남편의 직장이 도보 10분 거리인데 점심시간이면 집에서 요리도 못하고 있을 날 위해 도시락을 배달해 준다. (요리는 내게 미지의 항해와도 같다) 


가정의 대소사를 향한 남편의 이 모든 헌신을 아직도 예찬하고 있는 것은, 결혼 7년째 남편의 모든 것들이 아직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취향보다 뭣이 중헌듸


아내 따라 온 전시회에서 잠시 잠을 청해.. 본다


남편의 가정 돌봄 중 매우 주요한 것은 바로 '일 안 하는 아내의 취향 지켜주기'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소득도 없이 사는 아내의 실용적 자기계발도 아니고 취향 지켜주기라니. (취향을 고수하는 일에는 돈이 뒤따른다) 엄마의 문화생활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배려조차 없으셨던 아빠를 보고 자란 여자라서인지 (엄마는 뮤지컬과 콘서트를 좋아하셨다) 남편의 이런 모습은 아주 근사하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TV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내의 대형 책장 두 짝에 TV와 소파 자리를 양보했다. 남편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니 책장과 책상이 있는 거실은 오직 날 위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온오프라인으로 북클럽이든 글쓰기 모임이든 책으로 사람 만나는 일을 즐기는데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보다 육아를 잘하는 남편 덕택이다. 이른 새벽 책을 읽거나 글을 쓰고 있는 내 뒷모습을 보고 인기척 없이 평화롭게 출근해 주는 그 덕분에 고요한 아침을 맞이한다.   


아이가 돌 전후 걸음마를 제법 하게 되어 주말에 자주 외출을 하게 될 무렵, 매 주말 수도권의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가 전시회를 볼 수 있던 것도 남편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남편이 만약 주말 조기축구나 사회인야구를 다니는 사람이었다면, 캠핑이나 낚시를 좋아하는 남자였다면, 게임이나 예능 프로그램으로 회사 스트레스를 푸는 이였다면, 예술이 밥 먹여주냐고 투덜거리는 이였다면, 우리 가족이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말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를 찾아 다닐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날 따라 아기를 데리고 전시회를 다니는 남편에게 생각도 배려도 없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오빠는 왜 사람이 취미도 없어? 주말에 취미생활을 좀 해봐~"


취향을 갖기 시작하면 살뜰히 돌보고 지성과 감성을 동원해 애착을 갖고 가꾸는 나에 비해 남편의 여가가 너무 빈약해 보여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내뱉자마자 미안한 마음이 불쑥 올라와 후회막심했다. 내가 이렇게 놀 수 있는 건 남편이 자신의 취향이나 취미생활을 고집하지 않아서인데 말이다.


남편은 이렇게 나의 취향 여정에 아주 조용하고 묵묵하게 자신의 기여도를 쌓아갔다. (그리고 조금씩 자신의 지분을 챙겨갔다. 주중에 하루 정도는 놀다가 아주 늦게 들어온다거나 밤 늦게 슬쩍 라면을 끓여 먹는 식으로)


주말마다 남편에게 나의 취향을 강요하고 있다는 그 미안한 마음이 불현듯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만의 주말 미술관 나들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에게 예술에 관한 추억들이 축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 자체가 내게는 매우 중요한 사랑의 언어였음을. 내게는 인정하는 말이나, 정성 가득한 선물보다 그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자체가 사랑이고 낭만이고 행복이고 축복이었다는 걸.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지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간다. 둘이 한 공동체였을 시절, 그러니까 우리집이 둘의 작은 전쟁터였을 때, 방문을 닫고 들어가 기말고사 공부를 하던 난 '부부는 짧은 시간 사랑한 후 평생 총을 겨누며 사는 관계'라는 성치 못한 결혼관을 갖게 되었다. 엄마는 늘 약자였고 슬픔을 삼키는 사람이었으니까, 난 절대 남편에게 슬픔을 강요 당하는 여인이 되지 말아야지, 하며 이십대를 보냈다.


이렇게 불행하게 자란 내가 결혼 후 남편에게 요구한 건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하는 시간'을 되도록 길게 하려고 남편 회사와의 도보 10분 이내의 거주지를 고집했고, 예배만 드리면 될 교회에서 3040 부부 공동체에 굳이 참석하여 우리가 함께 있어야 할 의무적인 시간들을 만들었다. 나 혼자 얼른 다녀오면 될 전시회임에도 남편이 전시회의 한 작품을 보고 혹은 어떤 글귀를 보고 나와 같은 감동을 받길 기대했다.   


근무 시간 외에 개인 시간이 거의 없는 남편에게 뭐라도 좀 다닐래, 배우고 싶은 거 있니, 아니면 뭐 입고 싶은 옷이라도, 하면 꼭 이런다. 


"일단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열 다섯 살 이후 내 가정이 대참사 수준의 고난을 겪은 이후로 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삼키고 또 삼켜서 터져버릴 것 같았던 내 마음을 아는 사람처럼.




남편의 취향을 받아줄께요?!


무대에서 열연 중인 남편


나의 삶과 취향이 이렇게 한없이 무겁고 진지한 데 비해 남편은 다소 촐싹맞고 들썩거리는 사람이다. 인생이 둠칫둠칫. 남편이 가장 남편다울 때는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켜놓고 부엌에서 파스타를 만든다고 팬질할 때이다. 랩이나 발라드, CCM 등 여러 장르가 흘러 나오고 그 때마다 부엌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듯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연애할 때 남편의 차에 타면 쇼미더머니와 언프리티랩스타 래퍼들의 음악이 들렸고, 회사 워크숍의 랩 공연 무대를 준비했더랬다. 교회의 새가족 초청 행사 때는 워십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몸을 불살랐다. 평소 말 없는 사람이 뮤지컬 관람 후에는 감동을 표현하느라 말수가 늘어난다. (전시 관람 후에는 보통 얼굴이 난색이 되어있다)   

 

내가 미술 작품을 앞에 두고 삶의 온갖 생동감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게, 남편은 음악이나 공연과 같은 것들 속에서 영혼의 울림을 경험하는 듯하다. 


돌아보니 미안하게도 남편의 유일무이한 음악적 취향을 나는 한 번도 받아준 적이 없었다.


무대를 즐기는 사람인 것 같아서 퇴근하고 밤 늦게까지 워십 공연 연습을 간다고 했을 때 단지 그대로 보내준 것, 아빠와 함께 무대를 누리는 아이로 컸으면 해서 딸 아이가 기저귀를 떼자마자 뮤지컬 학원을 보내준 것 정도였다.


주거니 받거니.

기브 앤 테이크.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기.


남편이 내 취향을 이렇게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더라면 지난 5년간 난 육아 우울증과 코로나 블루를 앓으며 심신이 쇠했을 것이다. 올해로 남편이 마흔이다. 이제 남편의 풍성한 사십대를 위해 내 편이 아니라 그의 편에서 그의 취향과 입장을 배려하며 살아야겠다.


아니, 살고 싶다. 

'살아야겠다' 보다 '살고 싶다'가 내 마음에 더 좋다.          




2022.05.27

이제는 취향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부부가 되어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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