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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Jul 01. 2022

응급실 앞에서

경멸하고 절연하고, 그리고 그 다음

 

나의 부모는 불운하고 서글픈 데다가 늘 누군가를 향한 격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감정의 골이 깊은 사람들이기도 했고 나는 성장기 내내,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한동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내가 내 부모와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개 씁쓸하거나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그래도 부모인데 가족인데, 하고 말한다.
    그래요.
    그게 무슨 말인지 나도 압니다.

- 황정은 <일기 日記>



경멸해.

경멸한다.

경멸해요.

경멸합니다.

당신을 경멸하는 것 같습니다.


멸망해라. 그의 인생이 조각 조각 무너지고 하늘이 크게 노해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 빗물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수준의 슬픔을 당해라. 


그렇게 한 사람을 경멸하고 그의 멸망을 소원하고 악한 마음을 품을 때마다, 미워했던 그 대상은 점점 작아지고 사그라들어서 온데간데없어지고 나만 나쁜 사람으로 홀연히 남아 있었다. 나쁜 사람 혹은 나쁜 것, 나쁜 무엇.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은 늘 외로워지고 점점 상하더라. 

 





절연.

당신과 절연하려고 합니다.

절연을 선언합니다.


절연, 이라고 말하면서도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아는 것, 아빠 당신의 몸과 마음이 다 쇠해서 인생의 후반부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을 때 우리가 다시 인생의 처음처럼 긴밀하게 연결될 것임을 알기에. 절연, 이라는 말은 우리 사이에 해석할 가치도, 부여할 의미도 없는 무색한 이야기.


그 무색한 이야기를,

3년에 한 번, 

2년에 한 번, 

1년에 한 번씩 하고 살았다. 


그래서 마지막에 절연, 이야기를 했을 때는 더 이상 상처도 아니었고, 더 이상 진실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는 매년 절연을 선언하는 못난 가족이었을 뿐이다. 피붙이와의 절연은 '그 사람과의 단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과의 불화는, 내 인생을 증오하고 혐오하는 이야기이며, 상처가 곪아 터지도록 방치하는 것이며, 영혼을 삭게 만드는 악마였다. 내 인생은 더 이상 잘될 수 없을 거라는 착각 혹은 내가 밟고 있는 땅은 오물로 질척거리는 밭이라 상상하게 하는 지독한 기억이었다.






그래서 다시, 은혜.


스무 살에는, 그러니까 부모의 불화가 곧 내 불화, 부모의 분노가 나의 분노, 부모의 싸움이 나의 싸움, 부모의 무너짐이 곧 나의 삶이라 여겼던 그 때는 이 모든 불화를 거두어 주시라 기도했다.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도 모르고 아무튼, 기도했다. 거두어 주소서. 거두어 주소서. 


서른 일곱, 아빠가 실려 들어갔다는 응급실 앞에서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며 올려드린 기도는, 내 말을 거두어 주시라, 경멸을 입에 올리고 절연을 선언한 나의 말을 깨끗하게 거두어 가시라. 나의 언어가 이 세상에 남아 둥둥 부유하지 않게 깔끔하게 거두어 주시라. 혹 나중에 그 언어들이 내게 돌아오지 않게, 모든 것 다 하실 수 있다는 하나님 당신께서 다 청소해 주시라. 


초여름 새벽녘의 아산병원 앞길의 공기는 미지근했다. 내 기도가 간절하든 말든, 우리 삼남매가 슬프든 말든, 아빠가 아프든 말든, 우리의 앞날이 뿌옇든 말든, 상관없어 했다. 


아산병원 앞길 공기는. 






바다야, 기다려.



2022.07.01

기억하고 기록합니다.

오늘은 이 날을 꼭 기억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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