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예쁜 것들
노망들 걱정만 빼면 이순이 넘은 나이도 살맛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잔잔한 날도 많았건만 들끓는 풍파를 헤치고 겨우 도달한 것 같은 이 평화와 자유도 지키고 음미할 만한 경지라고 생각한다. 과찬이나 과공도 평화를 해친다. 늙으면 조금 모자라게 먹어야 속이 편한 것처럼 칭찬이나 공경도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것이 훨씬 속 편하다. 아무리 좋은 것으로부터라도 과녁이 되는 것보다는 언저리에 수굿이 비켜나 있는 것이 좋다. 쓸쓸하기 때문이다. 노후의 평화의 진미는 쓸쓸함 속에 있다. 수상 소감이라고 잔뜩 노티만 내서 미안하다. 계면쩍어서 그런다고 양해해주길 바란다.
- 박완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언니, 눈이, 많이 편안해 보여요."
동의했다.
이 말을 들었던 올봄, 난 박완서와 아스파라거스의 기운을 한껏 받고 있었다. 좀더 말해볼까. 박완서의 '여사 티 안나고', '무해한' 문장들과 아스파라거스의 '겸손한 강인함'에 영혼을 내어주던 봄이었다. 박완서의 책과 아스파라거스 화분, 이 둘을 테이블 한 곳에 올려두고 사진찍어 두었다. 밥을 먹다가도, 딸 아이와 보드게임을 하다가도 책과 아스파라거스를 한 번씩 흘깃 보며 흡족해 했다.
내 인생! 너무 좋아! 했다.
내 눈이 편안해 보인다고 했던 동생은 10년 전부터 알고 지내며 1년에 한 차례 정도 만나 속 깊은 대화만 나누던 아이다. 어느 해에는 대화를 하던 중에 그 아이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렸고, 또 어떤 해에는 내 새끼라고 하는 아이를 안고서 초보 엄마 티를 잔뜩 내며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언젠가는 내가 꼭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내 눈은 늘 흔들렸다.
원래 강해 보이려고 하는 것들은,
매사 흔들린다.
상처와 자기연민으로 혼탁해진 눈물을 담아 내느라, 가족의 불행 한가운데 서서 엄마 아빠를 연민하고 두 동생을 주의시키느라(난 K-장녀다), 아기 돌봄에 부족해진 잠을 이겨 내느라, 출산 전에 못다 이룬 것들을 해내야겠노라고 긴장하느라.
그 아이가 내 눈을 정확히 봤다.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던 내 눈은, 올해 잔잔한 날들을 누리게 된 주인 덕분에 전례 없는 호사를 누린다. 기쁨과 용서의 눈물을 흘렸고, 와인 없이도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 지경의 행복한 피로를 경험한다. 내게 먼저 손 내밀어주는 사람들을 경계한다고 잔뜩 날을 세우느라 쓰였던 눈 근육이 풀어졌다.
다시, 박완서와 아스파라거스.
서문만 모아놓은 박완서의 이 책의 힘은 너무나 압도적이라, 일상의 지루한 권태라든지, 일을 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이라든지, 오랫동안 부모를 미워한 마음이라든지, 내 인생은 아직도 바닥이야 하는 초라하면서도 다 상한 심령이라든지 하는 부정적인 마음들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이 마음들이 내 생각과 입술을 주장하지 못하도록, 무력화했다.
20년 가까이 봄철만 되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주의로 힘들어 하는데 이번 봄은, 가뿐히 이겨냈다. 이 봄 동안 판교책방의 글모임을 시즌 1에서 4까지 쉼 없이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문장의 힘이 이렇게 강력할 텐가.
그런가 하면 아스파라거스는.
집 앞의 단골 꽃집에 들어가 나는 잎이 크고 굵은 건 부담스러워요, 키큰 놈도 싫어요, 줄기가 굵어 탄탄해 뵈는 것도 별로요, 초록색이 너무 진해도 안 됩니다, 했더니 꽃집 언니가 '아스파라거스' 어떠세요, 그게 뭐죠, 강한 식물이라 초보 식집사에게 좋아요, 그런가요, 어디 키워 볼께요.
이것 저것 다 피했더니
아스파라거스 화분 하나가 내 품에 있었다.
함께 샀던 고사리를 아스파라거스와 같은 공간에 두고, 같은 시간 물을 주거나 안 주었고, 같은 양의 햇빛을 받거나 안 받게 했는데, 아주 동일한 조건이었는데. 고사리의 줄기는 힘이 없어지고 잎은 가엾어졌고 아스파라거스의 얇은 줄기와 가늘고 작은 잎들은 강건히 서있었다. 물을 주면 주는대로 잘도 빨아 들이고 안 주면 안 주는대로 잘 산다.
강하구나.
주인이 애정을 쏟든, 안 쏟든 잘 있구나.
힘든 시절을 보내는 누군가 내게 연락이 오면 그가 있는 곳으로 가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과 아스파라거스 화분을 함께 주어야겠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이거나 화분을 안 키우는 사람이라도, 꼭 그렇게 선물할 테다.
오랜 벗이었던 아이가 떠난다.
젊은 날의 치기와 오만이 '이제 우리가 떠나야할 때'라고 손을 흔들며 떠난다.
2022.07.18
글 쓰는 오늘 시즌5 [우리들의 글루스]에서
첫 날 일기를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