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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Jun 14. 2022

용기 한 스푼, 먹어요

<불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를 읽고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태도다. 용기로 힘을 얻은 생각과 마음의 상태다.

- 매트 챈들러, <불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 머물러 있던, 나도 모르게 나의 내면과 동거하고 있던 감정에 대해 알게 되었다. 내가 흔히, 줄곧 '무심함' 혹은 '자신 없음'이라고 이야기했던 감정들이 실은, 엄청난 '두려움'이었다는 걸, 그로부터 내 신앙의 침체가 시작되고 있었다는 걸 이번 독서를 통해 알았다.


두렵다 말하고

두려움에 기도제목을 나누었던,

그 어떤 이들의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에

내가 벌벌 떨고 있었구나.






스물 한 살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신앙'이라는 선물은, 공짜로 받고 거저 누린 은혜는, 여느 신앙인에게나 그렇듯 내게 과분하고도 감당못할 축복이었다. 그 축복을 누리기 위해 출석하게 된 교회는, 하지만, 굉장히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곳이었다. 삶의 여러 시절과 교회의 여러 굴곡들을 거쳐오면서, 입밖으로 절대 내지는 않지만 '교회는 무능하고 오만하여 개선 불가능한 상태의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30대를 보내왔다. 


첫 번째 두려움 _

나의 이 모습을 보고 내 아이도 교회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까봐 무척 두렵다.  


그러면서도 세상에 속하고 싶지는 않았던 나의 선택지는 교회와 세상 사이, 그 어딘가였다. 교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만들어 낸 공동체 문화와 교회 트렌드에 휩쓸리거나 그 흐름을 좇고 싶지 않았다. 혹 내가 하는 말에 무의식 중에 교회의 무엇이 담겨 있을까봐, 복음을 전해야할 입을 굳게 걸어 잠궜다. 나의 간증을 듣고 싶어하는 이들 앞에서도 간증을 극도로 꺼려했고, 온라인에서 그 많은 글을 쓰면서도 신앙을 드러내는 한두 줄 조차도 쓰기가 어려웠다.


두 번째 두려움 _

이러다가 정말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하고 천국에 가게 될까봐 벌써부터 뼛속이 아파온다.   


교회 공동체 혹은 기독인 커뮤니티가 가꾸어 가는 문화나 조직을 외면하고 홀로 쌓아가는 신앙생활은 고상한 듯 했으나 외롭고 처절했으며 아무리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부르짖어도 '다른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된 느낌을 많이 받았다.


세 번째 두려움 _

나 혼자만의 종교를 만든 것 같아 외로움이 무척 크다.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 나를 더 부지런히 성경 앞으로, 기도생활로 이끌어 가기도 했다. 잘못된 복음을 믿으면 안 되니까 성경사와 성경주석을 더 읽으려 했다. 세상의 문화와 트렌드에 휩쓸리지 않으려 나 스스로 통제하는 것들의 목록을 이르자면 다들 놀랄 것이다. 어렵고 힘들 때만 하나님을 찾는 기복 신앙인이 되고 싶지 않아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늘 염두에 두며 산다.


네 번째 두려움 _

교회도 못 누리고, 세상도 못 즐기는 이 애매한 위치가 내 삶도 애매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올곧고 강건해 보이는 나무가 뚝- 부러져 버리듯, 교회를 불신한 채 억지스럽게 해나가는 신앙생활은 결과적으로 날 불신자로 전락시킨 듯하다. 


코로나로 이어진 지난 2년의 가정보육과 집콕생활로 인한 스트레스는 나를 그대로 무너뜨렸다. 불안이 엄습할 때마다 약간의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들었고, 삶에 대한 자기효능감이 떨어지면 거식의 습관이 불쑥 찾아와 건강을 흔들어 놓고 갔다. (거식은 다이어트 의지가 아니라 정신병이다)


다섯 번째 두려움 _

내 삶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니 하나님께 무척 송구스럽다. 


그 때마다 죽어라 다시 일어서고 회복을 작심하고 개조 정신을 가다듬지만 매번 느끼는 건, 지금 내게 초월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초월적인 힘이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능력이라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러나 그 다음은? 늘 이 물음표 앞에서 불안해 하다가 와인을 마시다 잠들어 버린 것 같다.


여섯 번째 두려움 _

운동 작심삼일 하는 사람처럼, 평생 신앙 작심삼일만 하다가 죽을까봐 무섭다.




    


<불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 책의 제목만 보고도 마음이 크게 동요한 이유는 '용기'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용기'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깨달았다. 내가 지금 얻어야할 건 '용기'이고, 대체 '용기'라는 마음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지에 대하여 (용기를 먹는다고 용기가 생기는 건 아니므로) 그리고, '용기'는 어떤 행위를 결과적으로 낳는 것인지.


'용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용기'는 어떤 친구랑 친하게 지낼까.

'용기'는 뭘 먹고 사는 아이일까.

'용기'는 어떤 색깔일까.

'용기'는 무엇을 경계할까.

'용기'는 어느 경우에 커지거나 작아질까.

'용기'의 유의어와 반의어는 무얼까.


저자는 '용기'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분명히 말해준다.  


용기는 먼저, 교회와 공동의 선에 헌신하게 하며 그 다음으로 복음 전도를 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전도의 대상자들을 향한 조건 없는 환대를 하게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한 '용기 있는 삶', 그러니까 헌신적이고 환대하는 삶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내 삶이 그 곳과는 굉장히 멀리 있는 곳에 뿌리내린 것 같다. 그 곳까지 가려면 처음 하나님을 알았던 2007년만큼의 처절함이 필요해 보인다.


이 책에서 내가 위로를 느낀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발달을 미리 정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의 신체적 조건을 미리 정해 두셨다. 정서적 조건과 성격, 위기 앞에서의 반응, 조화를 이루는 정도, 끈질김, 성취력을 특유의 기질에 맞도록 설계하셨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각자에게 맞춤형으로 정해 주셨다는 말이다.

- 매트 챈들러, <불신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용기>



용기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은 모두가 다르겠구나, 우리는 모두 정서적인 조건이 다르니까, 교회의 위기 앞에 반응하는 모습이 다를 테니까, 복음을 전하거나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해 환대할 때의 마음과 생각이 다를 테니까. 하나님이 그토록 고유하게 설계하셨으니까.






크리스천이 교회 밖에서 생성하는 문화나 트렌드에 대해 아무 입장도 아닌 상태를 취하는 일이 사실 내겐 편하고 좋았다. 크리스천 커뮤니티에는 관심이 없는 척, 기독교 문화 현상에 동의도 반대도 하지 않는 척을 할 때 '용기'를 장착해야할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나 같이 크리스천 문화에 대한 입장 표명을 난감해 하는 이들에게 저자는 삶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북클럽을 제안한다. 영적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 있든지는 중요하지 않다. 삶에 관한 모든 것들을 나누며 모두가 자신의 죄성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고 그렇게 연약한 서로를 사랑하기로 매번 결단하는 커뮤니티.


주로 독서나 글쓰기 모임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는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는 지점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커뮤니티를 기획하고 디자인하는 나의 마음을,

그 분께 드리는 것이다.


한계와 얼룩으로 뒤덮인

내 모습만큼이나 초라한 내 커뮤니티가,

복음에 스며들길 기도하는 것이다.

 


2022.06.14

크리스천 북커뮤니티 CRD에서

책을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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