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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Jun 03. 2022

생의 초반부 인연

가장 중요할 뻔했던 친구들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 최은영, <쇼코의 미소>



서른이 될 무렵, 문득 내 삶에 친구가, 언니오빠가, 동생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뭔가 내 인생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누구와 건강한 관계를 맺어오지도, 라이벌과 선의의 경쟁을 펼쳐보지도, 선배로부터 따뜻한 조언을 들어보지도, 마음이 손상될 만큼의 갈등을 겪어보지도, 혹 상처난 관계를 어른스럽게 해결해 보지도 않고, 어른의 날들을 보내온 것이 처음엔 놀랍고 신기하게 여겨졌다. 


여전히.

나는 지금의 나를 설명해야 할 때 인생의 초반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리고 둔했던 내 감각들을 극심하게 흔들어 깨운 초반부의 이야기들을 꺼냅니다.






어린 시절 매년의 3월 2일은 새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지금 다시 돌아보아 생각해도 어쩌면 그럴 수가 있었을까, 할만큼 밥 먹고 변 보듯 이사를 다닌 엄마 아빠 탓에 매 겨울방학은 새 집에 적응하고 새 학교의 친구들을 상상하며 잠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강북에서 강북으로, 강북에서 춘천으로, 춘천에서 강북으로, 강북에서 강남으로, 강남에서 분당으로, 어디에서 어디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이사를 하는 동안 내 방은 점점 넓어졌고 집도 멋있어졌지만 마음의 상태는 계속 훼손되어갔다.


가을, 겨울 즈음이 되면 꼭 경험해야 하는 친구들과의 이별은, 고학년이 되어갈수록 '애처롭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전학 첫날 담임이라는 분이 새 친구들에게 내 소개를 해주는 20초 가량의 시간 동안 매우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를 훑어 내려보는 몇십 몇명의 시선들을 견뎠다. 이미 몇 해를 함께 해온 그들 무리 앞에 뉴페이스로 나타난 내가 적절하게 살아남는 방식은, 뭐든, 잘하는 거 아니, 잘해주는 거였다.  


다행히 이야기꾼 재주가 있어 친구들 앞에서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대모사도 해주고, 어젯밤 드라마도 요약해서 알려주고, 어려운 숙제도 잘 알려주면 대체로 내게 호감을 드러내 주었다. 학예회 같은 행사 때는 가장 귀찮거나 하찮은, 어려운 역할들을 맡아서 했다. 그러면 자신들 무리에 끼어도 좋다는 사인을, 보내주곤 했다. 이쪽 동네에서 태어나 자라서 꽤 많은 친구를 알면서도 인기 한 번 못 누리는 몇몇 토박이들을 볼 때면 어쩐지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너 같은 박힌 돌보다 나 같은 굴러 들어온 돌이. 너처럼 사느니, 나처럼.


하지만 내게 그런 우월감은 시한부였다. 


봄, 여름, 가을 동안 아이들에게 애써 얻은 인기와 호감 같은 것들은 그 해 겨울 아이들에게 이사 소식을 전하면서 모두 삭제되었다. 거품나듯 몽글몽글 예쁜 모습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엄마가 나 이사간대. 전학간대.'라고 말하는 순간, 일시에 사라져 버렸다. 아이들은 '청하', 이 아이와 보낸 시간을 잠깐 꿨던 꿈처럼 여기고 제 삶으로, 제 관계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 되어 날 보내줬지만, 난 오롯이 혼자서 떠나는 마음을 챙겨야 했다. 


SNS나 메신저는 고사하고 핸드폰도 없던 시절, 엄마 아빠의 이사, 전학 선언은 나의 교우관계에 사망을 선고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들의 선언은 내 의지나 노력과는 무관했고 늘 불쑥- 들어오는 것이라.


전학가고도 한동안 이전 학교의 친구들과 손편지를 몇 십통씩 우편으로 주고 받다가, 어느 순간 '편지를 계속 보내면 이제는 그 아이한테 방해가 되겠구나.'하는 착하고도 슬픈 마음이 생겨났다. 그 아이들에게서 내가 깨끗하게 지워지길. 






아마 '약간의 거리를 두며 사는 방식'을 이 때부터 체득해 왔던 것 같다. 


약간의 거리.


너와 내가 어떠한 이별에도 마음의 형편이 굳건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 적절히 우정과 사랑을 주고 받다가 어느 선에서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못하고) 떠나도 아무렇지 않은, 그 거리를 측정하면서 인간관계를 해왔다. 그 거리는 환경에 따라, 사람마다, 가진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영육의 강건함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서 거리를 재볼라 치면 극도의 예민함이 필요했다. 거리감을 의식하지 않게 거리두기.


하지만 그렇게 애써 확보한 거리에는, 우정도 사랑도 경쟁도 갈등도 배려도 조언도 없었다.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었다. 적절한 우정이나 적당한 정도의 사랑 같은 것은 없었다. 관계를 덥히는 데 꼭 필요한 '다정함'이라는 것이 끼어들 틈이 없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난 누군가와 화합하여 함께 성장하거나, 착한 경쟁이나 성숙한 갈등을 해내는 게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 늘 관계를 생각할 때면 이루다 말할 수 없는 허무감에 미치고 싶을 때가 있다. 


성숙한 관계를 오래 지속적으로 잘 운영하는 이들에게 이런 것이 있더라.


'생의 초반에 만난 인연들'


이 친구들과 쌓아올린 추억과 관계가 대체불가능한 자산이 되어서, 그 거름 위에 사춘기의, 청년기의, 서른의, 마흔의 관계들을 아주 단단하게 다져간다. 하도 단단하여서, 어른이 되어 잠시 '관계의 기술'이니 '사랑의 언어'니 하는 것을 애써 배워 적용하려고 하는 이들은 감히 따라잡을 수도 없으리 만큼. 그렇게 강력한 관계들을 만들어 간다. 


왜냐면.


생의 초반에 만난 이들은 대체로, 조건을 따지거나 주고 받지 않으니까. 마음의 빗장이 활짝 열어제껴진 채로 만나니까. 갈등을 하더라도 어른의 그것보다는 순수하니까. 싸우더라도 어른이 만들어 놓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싸우다 곧 화해할 수 있으니까.  


물론, 생의 초반부 인연이 늘 골칫거리라고, 그 인연 때문에 인생이 이리 자지러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들도 봤다. 혹은 생의 초반부 인연을 나처럼 다 잃어 놓고도 인간관계를 멋지게 잘 해나가는 이들도 있는 줄 안다.  


그래도 잃어버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않습니까.

어릴 적 친구가 있는 사람들이 늘 부럽습니다만.






잠시나마, 내 생의 초반에 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그 어여뻤던 이들을 떠올린다. (사실 자주 떠올랐다 쉽게 사라진다) 


내가 쪽지를 적어주고 그림을 그려줄 때 작은 책상 귀퉁이에 붙여놓고 종이 아래 '청하가 그린 그림'이라고 썼던 친구, 피구 시합을 마치고 '청하, 너가 피구여왕 해. 난 2등 할께. 너 피구 인정!'이라고 쪽지를 건네줬던 친구, 내가 쓴 학예회 연극대본을 열심히 외우면서 '너가 나중에 대본 쓰면 나는 영화배우 할께.' 했던 친구, 전학을 공식화하는 날 롤링페이퍼와 개별 편지까지 모두 취합해 내 가방에 넣어줬던 친구, 엄마한테 크게 혼나고 입이 나와있는 내게 '너는 그래도 학교 갔다오면 엄마 있잖아. 난 엄마 밤에 들어오셔.' 했던 친구, 내가 보낸 편지에 빠지지 않고 답장을 보내준 친구, '청하 생일'이라고 교실 칠판에 온 축하 문구를 가득 채웠던 친구.  


이제 친구들의 눈빛과 말들이 기억 속에서 모두 옅어진다. 내 옆에 오래도록 그들이 있었다면 어떠 했을까 상상해 보면서.   



2022.06.03

내 생의 초반부 인연들을 그리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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