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너조이 May 31. 2022

양쪽 정렬을 좋아합니다

문장을 팽팽하게



이 원고를 왼쪽 정렬로 쓰고 있다. 문단 왼쪽은 가지런하지만 오른쪽은 들쭉날쭉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건 참을 수 없었다. 십오년이 넘도록 왼쪽도 가지런하고 오른쪽도 가지런하게 정렬되는 양쪽 정렬로 글을 썼다. 양쪽 정렬 상태로 글을 쓰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이핑 하는 내내 양 방향으로 당기는 장력이 느껴진다. 최근엔 이 힘이 조금 피곤하게 느껴져서 왼쪽 정렬로 쓴다. 쓰고 보니 참지 못할 일은 아니고 내가 문장을 쓰는 호흡이 양쪽 정렬이라기보다는 한쪽 정렬에 
    가깝
    다는 생각도 든다. 실은 자주
    이렇
    게
    읽거나 쓰니까.

- 황정은 <일기>



오래도록 레이아웃이나 줄바꿈, 정렬의 형태, 띄어쓰기나 맞춤법 따위의 '형식'같은 것들에 집착하느라 글을 못 썼다. 고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 안에서 늘 깐죽거리는 비평가가 '그러니 너 따위는 글을 쓸 수 없다.'고 웃으며 속삭인다. 형식에 집착하는 너 따위는.


하지만 분명히 난 왼쪽으로 가지런하고 오른쪽은 들쭉날쭉한 상태의 글을 견딜 수 없다. 2018년 브런치에 처음으로 글을 발행한 날, 모바일로 내 글의 외모를 확인했다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PC로는 분명 양쪽 정렬이었는데 모바일로 보니 왼쪽 정렬로 보이는 상황. 그 때 어느 정도 직감했던 것 같다. 브런치 플랫폼에서는 내가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 


형식이란 건 그저 그릇에 불과한 일일진대. 글의 내용을 가꾸는 일에는 그렇게 게으르면서 왼쪽 정렬에는 왜 이토록 집착하는 걸까 몇 차례 고민하다 멈췄다. 습관이려니, 아니면 기질이나 성향이려니. 대학 때도 발제 내용을 모두 만들어 놓고 PPT나 발제문의 형태를 갖추는 일에 몇 날의 밤을 지새웠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 만난 황정은의 문장. 


양쪽 정렬이란 자고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타이핑해 나가는 동안 양쪽에서 팽팽한 장력이 느껴져 좋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환하게 웃었다. 


맞아, 장력이다!


나의 문장이라는 것들은 흐물거리고 하찮아서 양옆에서 당겨줘야 남들이 읽어줄 만한 것이 된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품고 산다. 


이런 긴장감이 내 삶 안에서만 은밀하게 느껴지는 거라 생각했는데 글 깨나 본다는 이들이 내 글에 관해 이야기하며 짓는 표정을 보면 다들 내 긴장감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불편하듯, 내 글을 읽으면 다들 불편한 듯하다. 편하게 읽으시라고 애써 문장을 갖추어 놓은 건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식탁에 앉아 다이어리든, 5년 저널이든, 필사노트든 뭐든 쓰는 엄마를 보고 유아기를 보낸 여섯 살 딸 아이가 매일 자발적으로 그림일기를 쓴다. 아동기에만 그릴 수 있는 기상천외한 그림과 아직 서투른 한글로 일기장 한 면을 가득 채워 엄마에게 자랑하듯 일기장을 내미는 딸에게, 


"여기.. 왼쪽과 오른쪽에 글자를 가득 채워서. 써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팽팽하게."


'밥 먹었어'를 '밥 머거써'로 쓰는 아이에게, 양쪽 정렬 글쓰기의 팽팽함을 알려주고 싶어서.






그나저나 황정은 작가가 위 이야기를 하게 된 건, 자신이 여태 참을 수 없이 여기다가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 한두 가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연필로 책을 긋는다든지, 왼쪽 정렬로 글을 쓴다든지, 하는 것들을 참을 수 없었지만 이제는 괜찮다고 여기게 된 것.


내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내게도,

그런 

이 있을까.


이전에는 기필코, 단연코, 결단코 안 된다고 여기던 것들 중에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더 나아가 익숙해지고 어, 이거 괜찮네, 하고 여기게 된 것.


잠자리에 누워 TV를 보다 스르르 잠드는 것. 이렇게 잠들어도 다음 날 생각보다 피로하지 않구나, 연예인들의 대화를 듣다 잠들어도 꿈이 사납거나 마음이 어지럽지 않구나. 다음 날 아침 출근하지 않는, 일 없는 사람이라는 자기비하적 사고가 고개를 들지 않는구나, 하는 안도와 함께 괜찮은 습관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또 하나 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사람이 날 싫어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올 때면 참을 수 없었고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고 그 이를 대했던 나의 표정과 태도와 언어를 비평하며 그 이가 날 싫어하는 이유가 납득될 때까지 스스로를 괴롭혔지만 이제는 그런 짓을 관두었다. 누구든 날 싫어할 수 있다는 여유. 날 싫어하는 그들의 감정까지 받아주기에는, 내 옆에서 날 좋아해 주는 몇몇이 그윽한 시선으로 내 삶을 바라봐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 너무 애틋하여.


날 싫어하는 이들 덕분에, 날 사랑하는 이들을 더욱 아낄 수 있게 되었다는. 이토록 오묘한 사실에. 


역시 난 밟아줘야 단단해지는 사람인가.




2022.05.31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이 글을

꼭 쓰고 싶었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