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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조이 Jul 27. 2022

내 이야기 좀 들어보오

내 소개 말고 내 이야기 한 번


일을 끝내고 시간이 남아 『자화상』을 읽었다. 신기한 소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이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애는 나를 떠났다. 나는 검은색 셔츠를 입는다. 나는 열 살 때 제분소에서 손가락을 베였다. 나는 여섯 살 때 차에 치여 코가 부러졌다. 나는 열다섯 살 때 경오토바이에서 떨어져 엉덩이와 팔꿈치 살갗이 까졌는데 손을 사용하지 않고 뒤를 보며 길거리를 무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서사는 없고 순서 없이 '나'의 기호나 체험, 생각 따위를 나열한다. 화자의 말을 따라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재미랄까? 파편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화상 한 점 같았다.

- 장석주 박연준,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유치원 발표회 때 무대 위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서있었다는 이유로 집에서 엄마에게 호되게 혼났다. 여덟 살 때 학교에서는 늘 엄마가 나를 두고 미국에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상을 해댔다. 열 살에 전학간 곳에서 인생 첫 따돌림을 당하며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두 살 아래 동생을 업고 아스팔트 길을 뛰다 넘어져 한쪽 뺨 전면이 아스팔트에 쓸려 한동안 학교를 못 갔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중학교 때 한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마음이 스스로 너무 귀하게 여겨져 그 아이의 이름을 칼로 몸에 새겨 넣었다. 나는 보라색 자켓을 입었다. 스물 넷에 아빠와 크게 싸우고 강남 교보문고 구석에 앉아 울며 책을 읽다 잠들었다. 상위 10% 성적으로 입학한 첫 대학에서 반년만에 재입학 불가한 제적 통지를 받았다. 아이스하키 스틱으로 아빠가 내 허벅지 뒷면을 사정 없이 내리쳤다. 손버릇이 안 좋은 친구의 도둑질을 덮어주려 내가 훔쳤다고 선생에게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가 소년원에 갈 줄 알라는 소리를 듣고 어른을 신뢰하지 않기로 했다. 내 연인이 나랑 다정하게 대화한 남자사람을 심하게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과 사랑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돈이 없어 사지도 못할 캘빈클라인 청바지를 쳐다보고만 있다. 시력이 점점 안 좋아져 실명할 수도 있다는 연인의 말을 듣고 이별을 결심한다. 전교에서 바닥을 기는 성적의 친구가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요리를 해줬는데 맛있어서 놀랐다. 수학의정석을 12회독하다. 날 보는 이마다 크게 될 거라고 칭찬했는데 크게 되지 않은 상황을 조금 의아해 하다. 생리통을 완화하기 위해 복부를 뜨겁게 하는 일에 열과 성을 내다. 분만실에 누운 내 아랫 부분에 남자 의사 한 명과 간호사 세 명이 출산을 돕다. 아무도 모르게 씨앗에 관한 생각을 한다.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임금과 왕비 모두에게 총애를 받는 숙의 정도의 첩지를 받은 후궁이지 않았을까 상상한다.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해 대학원과 연구소까지 다녔던 사실이 자칫 고리타분한 여자처럼 보일까봐 과거에 대한 말을 아낀다. 세상에 책을 냈다. 책장의 가장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내가 쓴 책을 둔다. 술에 잔뜩 취해 길을 걷다가 하늘을 나는 듯한 가벼운 경험을 하다. 고등어구이와 아삭한 생오이를 먹으면 숙취해소에 도움이 된다. 복학한 남자선배들이 좋은 성적을 거저 먹으려 나랑 팀을 이루려 애쓰는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갈색 가방을 든 내게 가방 색깔이 뭐냐고 엄마가 핀잔을 주다. 그림 앞에 서있다. 아티스트를 따뜻하게 생각한다. 내가 만약 동물이라면 늘어지게 자는 코알라가 아니라 열심히 일하는 개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서글퍼진다. 건강검진 결과에서 자궁 부위 재검을 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만 이내 바쁜 일에 몰입하다. 늦은 밤 대학원 화장실에서 심하게 토하다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가다. 교회 오빠 같은 사람이랑은 결혼하기 싫어 교회 밖에서 만난 남자랑 결혼했는데 알고보니 교회 오빠 중 교회 오빠인 남자였다. 동 트기 전 새벽의 북서울꿈의숲을 혼자 걷다. 이 곳에서 이십대를 잘 마무리하겠노라 다짐하다. 강아지에게 정을 주다. 강아지의 발톱을 깎고 이빨을 닦이다. 산책을 해주고 샤워를 해주고 관절이 좋지 않다 하여 수술을 시켜주다. 중식당에서 잡채밥을 주문하는 내게서 잡채밥을 좋아하는 아빠를 발견하고 잠시 현기증을 느꼈다. 십수년 뒤에 있을 폐경을 걱정하다. 책을 읽으며 혼자 웃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이들이 잘 교화되어 출소하기를 기도한다. 잠시, 아니 꽤나 자주 북한을 떠올린다.


이랬다. 이러하다.

저랬다. 저러하다.

그랬다. 그러하다.


위대하지 않지만, 이것이 내 자화상.



2022.07.27

서사 없이 글자들을 나열해 봅니다.

판교책방 쓰기써클 '글 쓰는 오늘'에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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