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너조이 Mar 05. 2023

서른 여덟 살 청하 어린이

청하 어린이, 한 번 말해 봐요 :)


"언제는요, 피구 할 때 제가 제일 마지막에 남았거든요. 그때 한 이십 번쯤 피했을걸요? 애들이 막 저만 남으니까 저희 팀 애들은 응원하고요, 다른 팀 애들은 화난 것처럼 던졌는데 제가 받았거든요. 아니, 받으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 공이 와서 안 맞으려고, 그냥 안 맞으려고 딱 했는데 딱 잡은 거에요. … "

어린이의 '부풀리기'에는 무시할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매력이 있다. … 어린이의 '부풀리기'는 하나의 선언이다. '여기까지 자라겠다'고 하는 선언.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중




청하 어린이,
요새 신나는 일 있어요?




선생님,

저 옛날에, 아주 옛날에요. 선생님 놀이하는 거 정말 좋아했잖아요. 내가 조금 더 먼저 알아서 좋았던 거, 유익했던 거, 동네 친구들하고 동생들 앞에 앉혀 두고 화이트 보드에 설명해 주면 걔네들이 막 끄덕, 끄덕 하면서 나보고 '청하 선생님, 청하 선생님.' 하면 제가 엄청 기분 좋아했잖아요. 그래서 우리 엄마는 내 방에 꼭 화이트 보드를 벽에 걸어 주셨고요. 난 내 식의 지식정리를 좋아했고, 그 정리노트를 좋아해준 친구들을 꼭 챙겨주고 싶어했잖아요. 아니, 그 친구들을 좋아했고 아껴주었어요. 


친구들 엄마들이 '청하랑만 있으면 우리 애가 숙제를 다 해가지고 온다'고, 저를 좋아해 주었는데 전 그 칭찬이 너무 좋았어요. 친구들은 뭐든, 청하랑 하겠다고 하면 엄마 허락을 받을 수 있어 좋았고, 전 내가 '청하 선생님'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좋았어요. 


그런데 선생님, 

점점 선생님 역할 놀이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저의 내면에는 늘 '청하 선생님'이 있어요. 일러주고, 칭찬해 주고, 교실 뒷편에 움츠러 있던 아이가 칠판 앞까지 나올 수 있을 때까지 애쓰는 저를 대견해 해요. 그 마음은 마치 풀잎 위의 이슬이 표면장력을 받아 아주 아주 동그랗게 앉아있는 모습이죠.


있잖아요, 요새 사람들을 모아 글짓기 놀이를 하는데요. 든든한 '청하 선생님'이 있어서 이 놀이가 너무 신이 나요. 옛날에 그, 논술 학원 가기 싫어했던 친구가 우리집 놀러 왔다가 일기도 쓰고 시도 쓰고 그랬었잖아요. 그 친구 엄마가 막 놀라고요. 요새도 월요일에 요이땅, 해서 금요일에 땡, 하면 자기가 쓴 글을 꼭 제출하게 하는데요. 그렇게 모인 글 읽을 때 그 옛날 친구들 눈높이 수학 채점해 주던 '청하 선생님' 기억이 나서 웃음이 나요. 


'청하 선생님'이 제 마음의 소리를 많이 들어 주세요. 전 '청하 선생님'을 따라 글짓기 놀이 규칙도 만들어 보고, 놀이를 힘들어 하는 친구와 대화도 해보고요, 재미있어 하는 친구에게는 난이도 있는 규칙도 만들어 주고요. '청하 선생님'과 글짓기 친구들 사이에서 맘껏 상상하고, 생각하고, 때로는 뛰어 노는 게 너무 좋아요. 나중에 글짓기 친구들과 함께 쌓고 나눈 글들로 밤새 팝콘 먹으면서 수다도 떨 거에요. 




Note. 
마흔 해 가까이 살며 늘 내 안에서 날 선하고 아름답게 인도해 주는 존재를 느낍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존재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싶었어요. 그런데 나이가 들어 '선생님' 하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게 부끄럽게 되었네요. 어그러지고 왜곡된 나의 마음을 평온한 호수처럼 만들어 주는 '청하 선생님'.








청하 어린이,
이루고 싶은 꿈이 뭐에요?




나는 자연주의 브런치 식사를 제공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사장님이 꿈입니다. 친정 엄마가 살고 있는 단독주택을 제값 주고 사서 거기에 공간을 가꿀려고요. 부동산에 물어보니 그 건물을 사려면 억, 억, 억, 억 소리 나는 돈을 내야 한다는데. 내 나이가 이제 겨우 서른 여덟이잖아요. 앞으로 살면서 뭐 억, 억, 억, 억 하는 돈 못 벌까요? 악, 악, 악, 악 열심히 일해서 억, 억, 억, 억 만큼 벌어가지고 거기를 사면요. 


일단! 건물부터 예쁘게 다시 만들고요.


1층에는요. 복합문화공간이나 신진작가 갤러리를 만들 거에요. 난 아티스트를 사랑하며 따뜻하게 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았거든요. 다양한 예술들이 이곳 1층에 드나들게 할께요. 이곳에 오는 친구들이 예술의 들숨과 날숨을 느끼며 치유와 쉼을 누리도록, 나는 잘할 수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요. 책에서 읽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게' 노력하라고 했거든요. 


2층은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딸 아이의 화실이나 악기 연습실로 꾸밀게요. 그 때를 위해 나는 첼로를 배우려고요. 중저음의 현악기, 첼로 소리가 건물 안팎을 중후하게 붙들어 주는 모습을 상상해요. 딸의 그림과 나의 첼로 연주는, 언어로는 차마 교환될 수 없는 깊은 영감과 감수성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줄 거에요. 2층에서 우리는 삶을 회복하고 일상을 가꾸며 상처를 치유할 견고한 힘을 얻겠죠.


우리 마음의 미술관, 우리 마음의 연주회. 


3층은 바깥 활동을 아주 제한적이고 계획적으로만 하는 저의 내적 라이프(?)를 위해 책, 와인, 노트북 정도가 담긴 마치 비밀의 상자 같은 방으로 만들 거에요. 누구든 열면 깜짝 놀랄 거에요. 열지 못하게 하려고요. 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와인을 먹고 어떻게 취해 잠드는지, 노트북을 열어 어떤 글자들을 적어 내려가는지, 아무도 모를 거에요.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진짜 웃기고 재밌는 여자가 살았던 방, 으로 알려질 거에요. 내가 천국으로 떠나는 걸 축하해 주는 천국환송파티가 이곳에서 열리길. 


4층은 우리 가족의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각자만의 지극히 독립적이고도 개인적이고 은밀한 취향을 보장하는 몇 개의 방, 그리고 그 방에서 길어올린 지혜와 인사이트를 교환할 다이닝 룸을 꾸며 놓으면 어떨까요? 


아, 그리고 옥상에는 나만의 전용 헬리콥터 주차장을 만들려고요. 문득, 문득 다른 나라에 놀러가고 싶은데 공항까지 가서 탑승수속 밟고 이륙 시간 기다리는 시간 너무 귀찮아서요. 


헬리콥터 붕붕.




Note.
단 한 번이라도, 내 꿈을 속시원하게 말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정말 예술적인 사람일까, 내가 그만한 돈을 벌 수 있게 될까,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꿈 한 번 못 말하고 사는 내가 가여워서. 그래서 '어린이'라는 가면을 쓰고 맘껏 떠들어 봅니다. 




2023.03.06.월

이너조이의 '글 쓰는 오늘' 시즌 10

우리들의 글루스Ⅱ에서 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의 크림(Cream)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