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네 단어가 내 삶을 설명합니다.
ㄱ 고대 그리스
다시 태어난다면 꼭 경험해보고 싶다던 곳. "다시 태어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된다면"이란 단서를 달고 온 답문. "모든 방향으로 기차표를 찢어 날리"며 숨차게 달려 나가는 장발의 제주 소년. 어쩐지 그의 몸속에는 밤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를 내며도는 피가 있다고.
ㄹ 라면
안성탕면 애호. 된장 맛이 나는 장라면에 대한 애정을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표현한 적 있음. …
김애란 『연호관념사전』中
ㄱ
글루스
작년 6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보고 펑펑 울다. 사람이 어떻게 이런 대본을 쓸 수 있었을까 싶어서 두 번째 정주행을 할 때는 인물들의 대사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알았다. 희망으로 나아가려는 발버둥, 우리 모두의 발버둥, 어쨌든 발버둥, 그 발버둥을 쓰고 싶었던 거였구나. 그럼 나도 발버둥, '블루스(Blues)'가 흑인 노예들의 우울함과 슬픔을 담은 대중음악 장르였다면 나는 '글루스'. 매일 일상을 글로 씀- 으로써 삶의 희망을 확보하고 우렁찬 모습으로 살 테다. 글루스!
지금 우리들의 글루스Ⅱ가 진행 중이다.
ㄴ
뉘앙스
아주 미묘한 차이. 그 차이에서 파생되는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다. 좋아한다. 그래서 지금 이러한 관념사전을 쓰게된 것일 수 있겠다. 개인의 뇌와 마음은 각각의 우주만큼 광활해서 우리는 종종 신호를 잘못 주고 받는다. 나는 칭찬하려고 쓴 단어인데 누구는 상처로 받고, 나는 함께 문제를 헤쳐 나가보자고 이야기한 건데 누구는 예민하게 굴지 말라고 받아친다.
나이 드니 자꾸 나랑 뉘앙스가 비슷한 사람만 만나게 되고 찾게 된다. 뉘앙스가 다르면 내 마음이 자주 다쳐서 힘들다.
ㄷ
돌(돌멩이)
팔딱 팔딱 뛰는, 열정인지 뭔지 정신 없는 마음이 들 때 돌만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는 차가워지고 돌 위에 내가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이 상(image)에 맺힌다. 스타벅스 목동역점에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를 읽다가 울었던 이유도, 대전 미술관에서 이우환 작가의 바위 작품을 보고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던 이유도, 부산 태종대 바다에서 아이와 돌을 무진장 주우면서 돌 파티를 열었던 이유도. 모두 같은 이유일 것이다.
돌멩이 같은 자아상을 원한다.
ㄹ
리을
한글 'ㄹ(리을)'만 보면 한자 '己(몸 기)'가 생각난다. 그리고 얼마전 딸 아이가 왜 '쌍리을'은 없냐고 물었는데 쌍리을이 있었다면 한글 쓰기 진짜 귀찮았겠다고 혼자 웃었다.
ㅁ
마음
마음으로 정치를 하는 건 어떨까요, 라고 물었다가 정외과 선배가 '야, 한 잔 마셔!'했던 기억이 내게는 있다. 외대앞의 청사초롱 술집에서. 그 뒤로 늘 반항하듯 모든 것 앞에 '마음으로 OO를 하는 건 어떨까.'하고 생각한다. 마음으로 책을 읽기, 마음으로 요리하기, 마음으로 욕실 청소하기, 마음으로 꽃에 물주기, 마음으로 쇼핑하기, 마음으로 운동하기, 마음으로 부동산 계약하기.
나는 '마음으로' 무언갈 하는 게 편하고 좋다. 최근에는 마음으로 기획하는 일을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단 한 사람을 위한 기획, 치유를 위한 기획..
ㅂ
분당
내 인생의 슬픔이 시작된 곳. 누군가 '슬픔이 무엇입니까' 물었을 때 '그건 분당이에요.'라고 말할 수도 있을 만큼, 그러니까 슬픔은 곧 분당, 분당은 곧 슬픔, 분당은 슬픔이고, 또 슬픔은 분당이지, 하는 아무도 이해 못할 사고 회로의 중심에 있는 동네. 2007년 여름에 떠나 2010년 즈음 덜컥 찾아 갔다가 탄천을 보며 슬픔에 공격 당한 이후로 쉽사리 찾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분당을 다시 찾았을 때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 '분당과 슬픔'의 회로가 이제는 끊어져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ㅅ
씨앗
남몰래, 씨앗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현상은 지표면 위에 돋아난 새싹, 이파리, 줄기이기 전에 '씨앗'이라는 '과거'와 '원인'을 품고 있다고 장담하면서. 내 인생의 과거와 내 감정의 원인을 파헤치는 일을 즐거워 한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나의 이러한 모습을 달가워 하지 않으셔서 '모든 씨앗은 내가 자라게 하니 너는 물만 주어라.'고 말씀하실 때 입이 뾰로통해진 적 있다.
청소년 성장소설을 쓰고 싶어 플롯을 구성하며 메모를 끄적이다가 가제에 '씨앗'이라고 썼다.
ㅇ
예종 (조선 8대 임금)
조선에서 가장 짧은 재위기간을 가진 임금. 기가 센 세조와 정희왕후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형이 먼저 죽고 '어쩌다' 왕이 된 건데, 죽은 형의 와이프가 조선 최고의 여장부 인수대비라. 엄마였던 정희왕후도 예종을 지지하지 않았고, 왕비가 되지 못한 설움과 복위 야망이 매우 컸던 형수 사이에서. 병약했던 예종은 자기 아들에게 보위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고 결국 형수의 아들 자을산군이 뒤를 이어 성종이 되었다.
어쩔 수 없음과 무력한 상태를 떠올릴 때 곧잘 예종 임금이 생각난다. 무력하기로 따지면 그에 앞서 단종 임금도 있었고 정종 임금도 있었는데. 재위기간이 가장 짧았다는 이유로.
ㅈ
조선
어린 날 조선이라는 나라를 마음에 품었던 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조선의 예와 도, 정치경제, 문화와 예술, 외국의 침략으로 더욱 강해지는 잡초 같은 기개, 왕과 왕비와 그네 가족들의 처연했던 궁중 삶, 서민들의 행과 불행을 공부하면서, 내 인생의 행과 불행을 해석하는 능력을 길렀다.
조선의 500년 역사와 일제 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이 세워지는 과정을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어 나의 십대, 행복했다.
ㅊ
청아한
내 이름은 청하. 맑을 청, 물 하. 맑은 물을 연상시키는 '청아한'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면서도 이것은 진실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다 최은영의 『애쓰지 않아도』를 읽다 깨달았다. '깊은 물 속에 던져진 채반'. 물 밖에서는 조금의 물도 머무를 수 없는 채반이지만, 깊은 물 속의 채반은 모든 물이 계속해서 몸을 통과하느라 때가 낄 일도 없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깊고 깊은 상태. 맑음과 깊음이 온전한 상태. 청아한.
ㅋ
ㅋㅋㅋ
얼마 전에 ㅋㅋㅋ에서 ㄲㄲㄲ까지 넘어가기 일보 직전의 웃음을 아주 오랜 시간 터뜨려 가족을 놀라게 한 적 있다. 눈물이 감정 정화에 효능 있다는 이야기는 믿어도, 웃으면 행복이 찾아온다는 말은 시큰둥하게 들었는데. 맞나보다. 웃으면 행복이 오나 보다. 그 날 저녁에 행복한 듯 혼자 히죽히죽 웃는데 아이처럼 웃는 엄마를 보던 아이가 춤을 추고 사랑과 감사가 가득한 편지를 몇 장씩 써주었다.
행복이 이런 거라면 자주 웃겠다고 다짐한다.
ㅌ
태아
산부인과에서 내 배에 '태아'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내가 스스로 귀하게 여겨지는 나만의 소중한 경험을 했다. 출산과 육아라는 태산 같은 슬픔과 대양 같은 희생을 통과하면서도 나 축복 받은 여자에요, 라고 할 수 있었던 이유. 나 스스로를 아끼고 존귀하게 여기도록 해준, 너무나 말도 안되게 작은 생명이 내 뱃속에 있다가 세상에 까꿍, 하고 나왔다. 태아는 세상에 나와 사람이 되었고 나는 엄마가 되어 '귀한 사람'이 되었다.
ㅍ
폄훼
'어휘의 뜻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아빠에게 크게 혼난 사연이 내게는 아주 많다. 그런 날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멍청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날 혼나게 한 수많은 단어 중 하나. 폄훼. 내가 '폄훼'의 뜻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할 때 당신은 딸이었던 나의 지능을 심하게 왜곡하고 폄훼했다. 당신 덕분에 난 '폄훼'의 뜻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폄훼의 마음이 갖는 모양과 색깔까지.
ㅎ
회고
강점 테스트 결과, 나의 강점 중의 강점으로 분석된 '회고'. 역사를 사랑하고 일기를 오래 써서인가. 아무튼. 나의 회고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감정 중심'이다. 그 날의 그 때에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물건을 들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사람과 대화 중이었는지, 따위의 것들을 주로 기억하고 기록한다. 2005년 12월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때, 그 겨울에 내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하여는 글도 한 편 쓸 수 있겠다.
2023.03.13.월
이너조이의 '글 쓰는 오늘' 시즌 10
우리들의 글루스Ⅱ에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