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심이 여러 개, 아니, 때로는 무수히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 노인이 이맛살을 한층 더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런 원을, 자네는 떠올릴 수 있겠나?"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내가 말했다. … "그래도 말이야, 시간을 쏟고 공을 들여 그 간단치 않은 일을 이루어내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 (무엇 무엇을)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중 '크림'
모든
걸
이해할 수는 없
단다.
하지만 이해하길 포기
하지 않고
그러니까 그 간단치 않은 일
들을 이루어
내면 크림이 되어. 어느 노인네의 말처럼.
어느 날 내 인생
의 지극히 당연한 진리가 되
어 아름답고 달콤한 삶으로 인도해 주지. 내 인생의 크림? 지금부터 이야기해 줄께. 지난 날 너무 써서 내뱉으려고 했던 것이 이제 내 인생의 아주 단단하고 달달하고 든든하고 대단한
크림이 되었지.
그대는 내면의 치유에 에너
지를 어디까지 쏟아 보았는가. 치유 따위, 필
요 없었다고 말할 텐가.
내 인생은 조금 달랐지. 치유를 하지 않고
는 단 한 발짝도 사람들 앞으로
세상의 무대로 나아갈
수 없었단 말이지.
치유를 하지 못한 삶에
학위가 무슨 소용인가, 사랑이 웬말인가, 지식과 선행이 다 무엇이란 말인지. 내적 치유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이 모래 위에 쌓은 성일
수밖에 없음을, 난 일찍 깨달아 버린 것 같네.
말해볼까.
내 안에서 피투성이가 된 어린 아
이를 데리고 난 참 많이도 걸어 다녔지.
때로는 길에서 멈춰
피를 닦아 주기도 해야했고 어
떤 때는 딱지가 져서 가렵다고 성화
인 아이에게 연고도
발라 주어야 했다네. 그 아이에
게 집착하는 내 뒷통수가 뚫어져라 째려보는 이들의
시선과 목소리를
짓눌러야 했지. 그들이 욕할
수록 난 더욱 신이 나서 그 길을 뛰
어 다녔네.
그뿐인가.
치유에 필요한 지식과 기
술 특별히 신앙심이 필요
했는데 그것들 하나 하나 챙기다 보니
내 인생은 '치유' 그 자체가 되
었다네.
치유에 완성과 끝이 있
다고 생각하는가. 아니었다네.
치유를 돕는 절대
자가 매일 같이 새 마음을 주시
는데 그것을 받을 때마
다 난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 자학과 자괴의 마음이 거두어지고 거울을 보며 웃음을 짓게 되는 것,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용서할 의지가 내 속에 들어차는 것, 과거의 아픔이 이제는 툭툭 털어낼 만한 먼지 정도로 작아지는 것, 급변하는 감정을 분출하지 않고 얼른 일기에 적으며 달래는 성숙한 자아가 생성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