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초밥을 먹었더라면
대구는 점잖다. 촐랑촐랑 나서지 않고, 마음씨가 고우면서 사려 깊은 물고기같다. … 잔뼈가 없어서 먹기도 쉽다.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내주는 관대한 생물이다. 순교자처럼 고결한 정신이 느껴진다.
… 나는 물론, 대구가 되고 싶다. 정종을 따끈하게 데워 대구탕을 안주 삼아 먹으며 생각한다. 지성과 품위도 있어 보이고, 살이 똑똑 부서지는 점도 좋다. 그래도 현실을 사는 여자로서 잠시 주저한다. 대구 같은 체형의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역시 칭찬은 아닐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 『부드러운 양상추』 중 '대구'
살면서 초밥을 예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이 나답다고 느껴지고 어쩐지 마음이 편하다. 초밥을 싫어하거나 초밥을 그럭저럭 여긴다거나 초밥은 예찬할 만 하지 않다고 여기는 마음을 품은 사람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다. 같은 지구에 살고 있는 그와 나지만 초밥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다르다면 우린 다른 신호를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첫 만남의 메뉴로 우리 사이에 초밥,이 선택지로 언급되었는데 눈이 맑지 못하고 작은 감탄사조차 없이 '그렇게 하시죠.'라는 식의 반응이라면 난 무척 마음이 상할 테다. 아마 초밥을 함께 먹으며 나누는 모든 대화들에 집중을 못하게 될 테지.
지구인은 모두 초밥을 좋아할 것, 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왜 초밥을 좋아해요?' 하고 묻는다면 필시 초밥을 안 좋아하거나, 초밥을 좋아하는 나를 기이히 여기는 것이므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지만 오늘에야 이 글로써 초밥이 나의 연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하여 밝히겠다.
초밥이 왜 '음식'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독립되어 고유명사로서 존재할 수 있는건지, 초밥이 어떻게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지, 초밥 같은 남자 혹은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초밥이 '나'라는 우주에 기여하는 부분이 무엇인지, 그 내밀한 이야기를 해야 하겠다.
(아, 내가 여기서 말하는 초밥이란 가장 기본적인 형태로 손으로 쥐어 만든 초밥이다. 김이나 유부로 감쌌다던지, 롤 모양이라던지, 다발 모양의 초밥 등은 아니다.)
그녀는 단순미가 극대화된 몸체를 갖는다. 양념과 소스가 줄줄 흐르거나 국물과 건더기가 난잡하기 이를 데 없이 혼합되어 있는 음식들과는 그 결을 완전히 달리 한다. 질서 없이 흐트러져 있는 파스타와 비교해도 마찬가지.
삶의 무게에 짓눌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 가지런히 누워있는 몇 피스의 초밥을 보면 매트 위에서 명상하는 것만큼이나 멘탈 측면에서 효과가 상당히 높다. 언젠가 이자카야의 바(bar)에 앉아 꽤 큰 목소리로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 작은 이자카야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사시미와 사케를 먹던 사람들이 날 보는 눈빛은 시끄러우니 조용해라,가 아니라 '맞아요. 그 말에 공감해요.'였다. (난 그렇게 받아 들였다.)
모호하고 난해하기 이를 데 없는 미술 작품들을 보다가 순백색의 달 항아리 작품을 볼 때 날 압도하는 평안, 그것과 동일 수준의 감정을 선물해 주는 친구가 바로 초밥 되시겠다.
그러니 감정 기복이 심하고 우울과 환희를 극단적으로 반복하는 내게 남편은 가끔, 아니 꽤 자주 처방약처럼 초밥을 들이민다. 초밥이 내 영혼까지 구원하진 못하지만 늪에 빠진 내 정서를 구원하는 일은 그녀에게 꽤 쉬울 것이다. 그녀는 이런 방식으로 나 아닌 여러 지구인들의 마음을 해결해 주었을 거라 짐작해 본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사실 초밥은 굳이 먹지 않아도 되고 예술로써 가만히 존재만 해주어도 될 일이다. 실제로 초밥 도시락을 노트북 옆에 열어두고 한두 시간 정도 작업했을 때, 마치 아티스틱한 디자인 오브제를 옆에 두고 작업하는 것 같은 착각을 경험했다.
하지만 초밥의 매력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갈하고 우아한 자태 너머에 발산되는 내적 아름다움, 그 맛에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미각의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깔끔한 맛'.
초밥을 먹을 때면, 내면의 기품이 넘치는 여성들을 떠올린다. 초밥은 착하고 예쁜 여자라기보다, 내면이 단단하고 관리 받은 느낌의 외양을 갖춘 여인 같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소 몸매와 피부 관리를 잘 하며, 속이 빈 수레처럼 쓸데 없는 말을 세상에 쏟지 않는다. 자존감이 얼마나 높은지, 초밥을 다 먹은 그릇 위는 초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하다. '님이여, 날 꼭 기억해 주세요.' 하는 자국 같은 것 하나 묻어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초밥을 먹을 때는 나의 옷차림도, 초밥을 함께 먹을 사람도, 초밥을 먹는 시간과 장소, 초밥 먹을 때의 나의 감정까지도 주의를 기울여 한 번 더 살펴보게 된다.
무릎이 해진 추리닝을 입고 초밥을?
삶의 재미와 영감을 나누지 못할 상대와 초밥을?
아침 시간에 끼니 때우기로 초밥을?
배고파 죽겠다고 초밥을 순식간에 해치워 먹기?
초밥은 두입에 나누어 먹지 않는다. 보통 한입 행이다. 이것도 초밥답다고 생각한다. 두입으로 나누어 먹을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상황들, 음식물 몇 가지를 그릇에 흘린다든지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먹는 이에게 못 생긴 모습을 보여야 한다든지 하는 상황들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입에 넣어 그 두툼하고 담백하면서도 적절히 신맛을 내는 초밥 하나가 입에서 완전히 소멸을 이룰 때까지. 초밥은 단정하고 고결하다.
출산예정일을 기다리던 어느 날, 왜인지 분만실에 입장하기 전 꼭 초밥을 만나야할 것 같아 만삭의 몸을 끌고 현대백화점 미아점으로 나가 그녀를 먹었다. 출산가방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랴!!! 그릇 위에 이열 횡대로 누워있는 초밥들을 젓가락으로 하나 하나 토닥이며 얻은 힘으로 뱃속의 아이를 이 세상으로 밀어낼 수 있을 거라는 의식을 채웠다.
결혼 4년차에 부부싸움으로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가는 험한 바다를 서핑했던 시기, 초밥을 참 많이도 먹었다. 초밥을 먹으면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그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아니고, 어려운 날들에 내 옆을 지켜주는 초밥을 자주 느끼고 싶어서. 그렇게 초밥을 먹다 우는 날도 있었고, 울다가 와사비의 공격에 '으악' 하는 날도 있었다.
아빠가 초밥을 싫어하는 사람이라 슬프다.
우리의 슬픔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었겠다,
하는 생각을
마흔 언저리에 와서 해본다.
2023.02.19.일
이너조이의 '글 쓰는 오늘' 시즌 10
우리들의 글루스Ⅱ에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