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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너피스 Nov 13. 2019

어느새 울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슬프다 ‘라는 감정을 느낄 때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변 사람들을 불러내어 자신이 지금 얼마나 힘들고 슬픈지 털어놓으며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오히려 사람들과의 연락이나 만남을 차단한 채 혼자 만의 공간에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슬픔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후자를 택했다. 겉으로는 밝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침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스스로 우울이라는 동굴 속으로 더욱 깊게 빠져들어갔다. 


슬픔을 오롯이 혼자 견뎌내는 것은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슬픔이 길어지면 그만큼 동굴생활도 길어졌고, 무음모드의 휴대폰에는 확인조차 하지 않은 문자메세지가 쌓여갔다.

 

나는 슬픔에 왜 이렇게 대처해왔을까.


| 사람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아이   


어릴 적부터 슬플 때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진심 어린 위안과 위로를 경험한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위로를 스스로 구할 줄 알게 된다. 하지만 나의 경우 어린 시절 슬픈 일이 있을 때 따뜻한 위로를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그만 징징거려’라던가 ‘알았으니까 뚝 그쳐’라는 반응이 대부분.


내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하다 여기는 부모가 내 슬픔을 알아주지도, 받아들여주지도 않는다는 건 꽤 큰 상처였다. 그렇게 감정이 거부당하는 경험을 수없이 겪은 후에야 깨달았다. 울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


그 때 나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받는다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그 ‘포기’라는 건 치명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바란다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이고, 사람들은 그러한 바람을 서로 채워주면서 관계를 맺어나간다. 하지만 내가 타인에 대한 기대를 포기한 순간 내가 맺는 모든 관계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 슬픔이 원하는 건 바로 ’ 위안‘이다


슬픔의 표현은 상대의 접근을 유발한다. 아기가 울음을 통해 양육자에게 보살핌을 요청하는 것처럼 말이다. 슬플 때 위로나 위안의 욕구가 충분히 채워지면 슬픔은 자연스레 누그러진다. 하지만 슬픔이 해소되지 않고 오래 누적되면 슬픔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 무망감이 더해져 우울로 변질되어 간다.

     

내가 슬프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것을 느끼는 것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무엇보다 힘든 건 내 슬픔을 다른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운다는 건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러웠다. 마치 남 앞에서 알몸으로 서있는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았다.  

    

내가 우는 모습에 상대가 당황해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거나 또는 못 본 하면 그 수치심은 몇 배는 더 커졌다. 슬픔이 수용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재현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남 앞에서 잘 울지 못했다. 누구는 감정을 숨기는 게 어렵다지만 나한테는 드러내는 것이 100배는 더 어려웠다.


그래서 그냥 이 번거롭고 거슬리는 감정 따위는 그냥 내 통제권 하에 둔 채 적당히 감추며 살았다. 아파도 안 아픈 척, 상처 받아도 괜찮은 척하는 건 이제 너끈히 잘 해낼 수 있었다.

           

| 부정적인 감정이 막히면 긍정적인 감정도 막힌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의 감정 통로가 2차선이 아니라 1차선이라는 것이었다. 슬픔, 분노,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오지 못하게 막으면 기쁨, 설렘, 행복과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함께 막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영혼이 없어 보인다.’라는 말을 꽤 자주 듣고는 했다. ‘좋네요’, '재밌겠네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곧잘 했음에도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까지 좋지도, 재밌어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다는 걸기가 막히게 알아챈 것이다.

      

그래서 어느 시기에는 내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한껏 오버스럽게 행동하기도 했다. ‘좋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동공을 확장하며 돌고래 소리를 내고, 부산스럽게 박수를 치는 등의 리액션을 내보인 것이다. 하지만 뒤돌아서면 내가 지금 뭘하고 있는 건가 허무함만 찾아오더라.

         

| 슬프다고 말하는 것에는 꽤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슬픔을 표현하지 않으니 잃게 되는 것은 너무 많았다. 관계에서는 친밀감이 없었고, 겉으로 보이는 나와 진짜 나와의 먼 괴리감은 내 자존감을 하락시켰다. 또 삶에서의 소소한 행복감도 잘 느끼지 못했다. 슬픔을 표현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이유도 단 하나였다.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감정표현 미숙아 상태였기 때문에 두려웠다. 그래서 인큐베이터 같은 아주 안전한 환경에서 먼저 조금씩 시도해보는 연습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가족은 날 것의 감정을 표현하기에 그리 안전한 대상이 아니다. 안전한 대상이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이미 건강하게 표현하며 성장했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 또한 그의 부모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감정을 나누고 받아주고 읽어주는 것에는 서툰 분들이었다. 그렇다. 그들도 부모라는 역할이 처음이었기에 잘 몰랐을 뿐이다.

     

어찌 되었건 나는 그나마 내가 별 짓을 해도 실망하고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을 선정해, 조금씩 용기 내어 슬픔을 내비쳐보았다. 상대방의 반응이 어땠냐고? 별 반응이 없었다.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그 반응이 나에게 엄청난 안전감을 주었다. ‘아, 내가 슬프다고 이야기해도 상대는 부담스러워하거나 피하지 않는구나.’를 경험한 것이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점차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울 수도 있는 사람이 되었다. 또 슬퍼하는 이를 위해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그때보다 행복해졌냐 묻는다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전보다 사는 게 편안해졌다. 친하던 친하지 않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전보다 더 많은 유대감을 느끼게 되었다.     


슬픔을 느끼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는 당신에게도, 나름의 그럴 수밖에 없는 경험과 기억과 상처들이 있었으리라 생각이 된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울지 않는 어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이제 슬픔을 좀 표현하고 사세요‘라고 함부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릴 지라도 당신의 슬픔을 용기 있게 표현해 볼 안전한 단 한 사람이 생기기를 함께 바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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