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허울 뿐인 복지 시스템의 민낯을 철저하게 드러내면서, 사회적 약자들과 그들을 둘러싼 제도의 부조리, 관료적 시스템에 대한 날 선 비판과 함께 ‘인간 존중’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심장병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된 다니엘은 질병수당을 받기 위해 복지센터의 문을 두드리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차디찬 냉대 뿐이다. 싱글맘 케이티는 보조금 신청을 위한 복지센터와의 면담 약속에 몇분 늦었다는 이유로 ‘제재 대상자’ 목록에 이름이 오른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지리를 잘 몰랐다”는 케이티의 해명은 ‘원칙’ 앞에서 무력하다. “원칙이 그렇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 존중과 배려 없는 공무원들의 태도는 약자의 고통과 이미 동떨어져 있다. 모든 행정처리에는 ‘나름의 순서’가 있어 망설임 없이 계속 다음의 차선만을 권할 뿐이다.
공무원들의 복장만큼이나 정확하리라고 기대되는 사회의 ‘시스템’은 실상 모순이 가득하고 촘촘하지 못한 그물망과 같아 다니엘과 케이티는 무력하게 걸러져 인간다운 세계 밖으로 밀려나고 만다. 인간의 고통을 데이터화하고 등급을 매기며 ‘구직’ 그 자체보다 ‘구직을 증명’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이 뒤틀린 시스템 속에서 약자들의 비참하고 암담한 모습은 개에 비유되며 우리로 하여금 그들에게 닥친 비극과 절박함을 마주하게 한다.
영화에서 그려진 뉴캐슬의 모습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와도 상당히 닮아있다. 생리대를 구매할 여력이 없어 훔쳐야만 했던 여성, 컴퓨터 사용이 익숙하지 않아 보조금 신청 단계부터 고생하는 노인, 고된 노동을 하고서도 저임금을 받고 있는 청년. 모두가 성실하게 일해왔음에도 자본주의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무임승차자’ 취급을 받는 다니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다니엘은 복지센터 벽에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스프레이로 휘갈긴다. 잃어버린 자존심을 찾기 위해선, 밀려오는 수치심을 덜어내기 위해선 “내가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스스로 선언해야만 한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 '개'가 되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그의 여정을 따라가던 영화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승소가 확실했던 질병수당심사 항고를 준비하며 꾹꾹 눌러썼을 이 메모의 내용을 다니엘은 결국 죽음으로 대신 전해야 했다.
나는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계속되는 비극의 순간 속에서도 영화가 결코 놓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존중과 믿음일 것이다. 다니엘은 부당함에 끝까지 맞서 싸웠고 절차와 당위가 아닌 인간적인 면모로 케이티의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잠시 나락으로 떨어졌던 다니엘 역시 케이티와 그녀의 아이들로부터 깊은 위로를 받았다. 다니엘 블레이크가 없는 현실 속, 이제는 우리가 케이티에게 다니엘이 되어줘야 하지 않을까? 가난뱅이 장례식에서 전해진 그의 조용한 외침은 아마 우리 모두의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요구에 응답하고 다시 이 사회에 인간에 대한 존중을 요구해야만 한다. ‘나’와 또 다른 ‘나’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