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려난 것들에 대한 생각. 지나쳐도 좋을 것들에 대한 생각. 생각이 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생각. 어금니에 꽉 물어도 잘 깨지지 않은 생밤처럼 말똥말똥한 그런 밤이 있다.
오늘이 내게 그런 밤이었다.
밀려난 책들에 대해 생각했다. 신착이 들어온 날이었다. 은빛 비늘이 넘실거리는 고깃배처럼 나무 어선 같은 북트럭에 싱싱한 새 책들이 가득 실려 들어왔다. 새 책을 손질해야 하는 우리들의 손도 바빠졌다. 리스트를 확인하고, 분류하고, 포장하고, 비치하고 팔딱거리는 새책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도록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새 책이 들어온다는 건 밀려나는 책들도 있다는 것. 기존의 신착들은 새로운 신착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도서관 맨 앞줄에 정렬된 그들의 자리는 길어야 6개월이었다. 밀려난 책들이 가는 곳은 달랐다. 운이 좋으면 중간에 운이 나쁘면 맨 아래 칸 서가에 들어가야 한다. 이 중에는 단 한 번도 대출되지 않은 책들도 있었다. 깊은 서가에 있어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왔으면 좋겠다. 1/3 지점까지라도 좋으니, 누군가의 손끝에서 넘겨졌으면 좋겠다. 누군가 머리핀 같은 예쁜 책갈피를 꽂아 주었으면 좋겠다.
지난 산책길에서 온몸에 덩굴줄기가 칭칭 감긴 아카시아 나무를 보았다. 아카시아 잎과 눈이 마주쳤다. 잎이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몇 잎 남지 않았으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문득 고통의 근원이 추워진 날씨 때문이 아니라, 덩굴줄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했다.나무는 덩굴줄기의 숨통을 끊어달라고 외치는 것 같았으나 누구도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환영받지 못하는 건 아카시아 나무도 마찬가지였다.텃밭 아래로 자꾸 뻗어나가려는 아카시아 나무를 텃밭 주인이 욕을 해대며 베는 것을 보았다. 지나쳐도 좋을 것들이었다. 보지 않았어도 좋을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을 보고 온 날에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카시아 나무처럼 자꾸 뻗어나가려는 생각의 뿌리들을 누군가 베어주었으면 좋겠다.
나와 남편 사이에는 교집합이 되는 낮이 없었다. 우리의 휴무는 다른 게 좋았다. 우리의 직업 특성상 매달 들쑥날쑥한 평일 휴무 스케줄을 짜야했다. 큰 아이의 일상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그리고 활동보조선생님과 친정부모님을 덜 의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휴무는 겹치지 않는 것이 좋았다. 교집합이 없는 낮이 되는 것이 좋았다. 겹쳐지지 않은 우리의 낮시간이 많을수록 가족의 일상은 평화로워졌다.가족 달력에 다음 달 휴무를 표시하려는데 23일에 동그라미, 그 옆에 별표가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의 생일일까? 제사일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정말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반드시 쉬어야 하는 날이라면 내일 출근해서 휴무를 변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이 나지 않은 채로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깜깜했다. 군밤이 먹고 싶어졌다. 뜬금없다는 걸 알지만 남편에게 군밤을 사 오라고 할까 고민했다. 밤이 깊은 만큼 남편의 술자리도 깊어졌을 것이다. 겹겹이 둘러싸인 검은 밤, 그 밤의 껍질 위에 노란 달 하나가 콕 박힌 것처럼 검게 익어간 노란 군밤 하나가 생각났다.
생각이 많은 밤이 있다. 입에 가득 고소하고 달콤한 무언가를 가득 물고 싶은 밤이 있다. 군밤처럼 바싹 구운 밤이 있다. 오늘이 그런 밤이었다.
브런치 발행 2시간 후-
브런치 이 글을 보고 남편이 군밤 한봉지를 사왔어요. 브런치가 만들어 준 만원의 행복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