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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도 비장한 양식

남편 친구가 거제도에서 보내온 석화 10kg

by 포도송이 x 인자

퇴근 무렵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재현이가 거제도에서 보내온 굴이 도착했나 봐. 집에 가면 확인해줘."

"어머, 굴을?"

나는 감사의 인사뿐 아니라, 두 남자의 인간성과 우정까지 소환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서 두 남자란 우리 남편을 포함한다. 평소 남편의 지나친 인간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그 순간만큼은 평소 남편이 쌓은 덕이 돌아오는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하튼 나는 먹는 선물 앞에서 참 나약한 인간이다. 게다가 굴은 내가 좋아하는 어패류가 아니던가. 싱싱한 굴은 초장만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굴무침, 굴전, 굴튀김, 굴떡국, 삼겹살 굴구이. 돼지기름에 노릇노릇 구워진 굴을 참기름과 쌈장에 푹 찍어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으면 정말 환상적이다. 막 잡아 올린 굴처럼 그날의 퇴근길은 싱싱했다.


집에 도착했다.

저 큰 택배상자는 뭐지?

설마 저게 굴?

택배 상자의 스티커를 보는 순간, 두려움과 무서움이 순식간에 덮쳤다.


전. 광. 석. 화.


맞다. 석화였다. 석화 10kg

거대한 아이스박스를 겨우겨우 주방으로 가져와 싱크대 위에 올려놓았다. 꽁꽁 봉해진 박스 테이프를 가르고 아이스박스를 개봉했다. 울퉁불퉁한 거칠거칠한 거무죽죽한 석화들이 생포된 채로 녹색 포승줄에 묶여있었다. 나는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아주 험한 물건이었다.


아니, 저걸 어떻게 먹으라고...

깐 생굴이 거무죽죽한 석화로 바뀌는 순간, 배려심 많고 고마운 남편 친구는 선물할 줄 모르는 눈치 없는 친구로 바뀌었다.


남편이 퇴근했다. 그 무렵 친정 부모님도 오셨다. 석화라는 사실에 모두들 적지 않게 놀란 눈치다. 그래도 친구가 보내준 귀한 석화이니, 손질이 급했던 모양이다. 넥타이를 풀고, 고무장갑을 낀다. 개수대에 석화를 붓는다. 솔을 준비한다. 껍질에 붙은 최소한의 찌꺼기를 씻고 또 씻는다. 야외용 부루스타까지 동원하여 솥단지 2개까지 준비 완료!


이제부터는 불의 시간이다. 이 험악하게 생긴 것의 입을 열게 하려면 이 방법 밖에 없다.

펄펄 끓어오르니 석화는 의외로 순순히 입을 연다. 석화의 자백들이 이곳저곳에서 터진다.

드디어 먹어도 좋다는 남편의 사인이 떨어지고, 우리 가족 5명은 숟가락과 칼, 젓가락을 무장한 채로 죄도 모른 채 자백부터 한 석화 앞에 모였다.


알은 굵었다. 맛은 달았다.


깐굴만 날름 호로록 먹던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뭔가 비장하고 거룩했다. 거제도 굴양식장에서 건져 올린 석화 10kg은 그렇게 우리 집 저녁양식이 되었다. 선물할 줄 모른다던 눈치 없던 친구도 누명을 벗었다. 거제도 특산품을 우리에게 진상한 진정한 친구로 원래 신분을 되찾았다. 오늘 밤 안에 다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석화 속 알맹이들은 서서히 사라졌다.


그런데, 이 수북 쌓인 껍데기 산은 뭐지?


석화 10kg가 쌓아 올린 껍데기 산은 거대했다.

한 알의 보드라운 굴을 보호하기 위해 단단하고 거대한 껍데기는 과대포장한 과대방어 같았다.

아니지, 바다의 거친 물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 석화 속 알맹이들이 요람 안의 아기처럼 잠을 자고 있다. 이 몽글몽글한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껍데기는 더 단단하고 거칠어져야 했을 것이다. 아직도 젓가락을 놓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등을 본다. 소일거리에 바둑이나 두시는 아버지의 손등이 거칠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장 왕성하게 일했던 중년 아버지의 손등은 석화처럼 거칠고 단단했었다. 덕분에 내 삶은 요람 속 굴처럼 평온했었다.


껍데기의 마지막 행선지가 궁금했다. 기사를 검색해 보니 석화나 조개 등 수산부산물은 주로 분쇄하고 건조 등의 처리를 거쳐 비료, 사료 등으로 쓰인다고 한다. 쓸모가 있다니 다행이다. 거칠게 살아온 생이, 거대한 보호막 같은 생이, 쓸모가 있어 다행이다. 거룩하고도 비장한 양식이어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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