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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Jul 04. 2024

노트와 노트북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시- 노트 두 권이 배달되었다.

갱년기가 낼모레인데 사춘기 갬성이 오글거리는 노트를 친구가 보내왔다.  기억나는 노트 선물을 받아본 것은 국민학교 때 칭찬 도장 100개를 받고 부상으로 받았던  넓은 칸 줄-노트가 전부였다. 그 이후로 노트는 줄곧 내돈내산 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이 오십에 선물 받은 시 노트는 표지부터 파스텔 감성이다. 혹여 '시금치, 마늘, 달걀, 참기름...'같은 장바구니 리스트나 급히 이체할 은행 계좌번호를 적었다가는 낭패다. 캘리그래피를 배워볼지,  윤동주 시집이라도 빌려와 필사라도 시작해야겠다고 맘을 먹는데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친구는 필사 말고, 직접 쓰라고 은근히 돌려 이야기한다. 갑자기 부담감이 바윗돌만 해졌다.  친구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친구는 마흔에 드라마의 세계에 입문하여, 입봉까지 하게 되었고 지금도 늦게 찾은 적성과 재능에 날새는 줄 모르고 드라마를 쓰고 있다. 친구 입장에서는 한 때 등단까지 한 친구가 몇십 년을 쓰는 기쁨을 잃고 사는 게  안타까웠을 것이다. 친구끼리 잔소리할 처지도 아니고,  본심과 진심을 선물로 보내온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는 아니고 써야 한다는 압박감을 견디며 일 년을 보냈다.





한 달 전 남편이 노트북을 사가지고 왔다. 웬 노트북이야 했더니 이걸로 열심히 써서 돈을 벌어오란다.

뭐 글을 써서 돈을? 아무리 공공기관 급여가 적다고 하나 나름 4대 보험 내는 사람인데 글을 써서 부수입까지 벌어오라니, 졸지에 리뷰 알바, 댓글 알바라도 해야 하나 이런 악덕 세대주 같으니라고.


친구의 노트 선물을 받은 일 년 후, 나는 그 압박감 덕인지, 어느 날 갑자기 용솟음친 쓰기 욕구 덕인지 4년 전에 작가신청해 놓은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물 노트북이라도 어떠랴 싶었는데, 느려터진 노트북을 쓰는 와이프가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어쩌면 진심, 자다가도 벌떡 깨서, 문장을 수정하고 잠이 드는 와이프가 달리 보였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확연히 줄어든 잔소리는 반가웠을 테고 브런치모임이 줄자 카드값이 줄어들었으니 이 또한 대환영이었으리라.


아직 시 같은 시는 쓰지 못하고 있다.  친구가 보내 준 시-노트도 아직 개봉하지 못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다. 시-노트는 볼펜똥이라도 묻을까 싶어 비닐도 벗기지 않고 필사 가방에 모시고 다닌다. 제법 괜찮은 문장이 써지면, 노트에 옮겨 적을 예정이다. 요즘 브런치스토리 안에서 머무르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학생이 책상 앞에만 앉아있다고 다 공부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열심히 끄적이다 보면 한 문장씩 늘어나겠지. 이게 다 노트와 노트북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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