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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Jul 01. 2020

서른 여섯 중년의 고개를 넘긴 글

내 이름의 기명기사가 인쇄되어 나가는 기쁨에 설레다 어느 날 문득 내 목소리를 담은 글이 쓰고 싶어 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잡지사 취지에 맞는 취재와 기사 쓰기는 결국 회사의 목소리지 내 목소리가 아니므로.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순결한 마음을 담아 글 쓰는 행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선배들과 편집장님에게 은근슬쩍 기대어 글 쓰는 습관을 바꿔야 했다. 의지하는 마음 대신 홀로 글쓰는 연습부터 시작해야했다.    




문예창작과 교수의 일반인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수업을 들을 때다. 수업을 듣기 전 잡지사에서 글쓰기 훈련을 많이 한 상태였고 편집장도 내 글에 크게 빨간 줄을 치지 않았다. 더 이상 그곳으로 출퇴근하는 상주 기자가 아니었기에 가족에게는 쓴소리 해도 남에게는 쓴소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과 비슷한 경우이지 않았을까. 내가 추측한 또 하나의 이유는 한 가지 주제로 몇 년간 글을 쓰다 보니 기계적인 내 원고가 크게 고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잘 쓴다는 착각을 잠시 해보기도 했던 것 같다. 글쓰기 수업을 듣기 시작할 무렵이 자기 합리화 착각에 빠져 살던 시기다. 근거가 빈약한 착각 속에서 내 문학적 소질에 대한 의구심은 항상 있었기에 도서관에 갔다 모집 공고를 보고 수업을 신청하게 된 것이다.


글쓰기 교실은 예상외로 공원 속에 자리 잡은 강의실이었다. 초록 자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교실로 수업을 들으러 갈 때면 다시 대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마음이 붕 떴던 기억이 난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을 맞으며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느 정도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도 붙었을 때라 수업 들으러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허나 수업시간마다 조별로 돌아가며 글을 발표하는데 어디서 그렇게 글 잘 쓰는 사람들만 모아놓은 건지, 그동안 내가 썼던 글은 공장에서 찍어낸 영혼 없는 ‘공장 글’ 같은 느낌이 들더라. 수업을 들을수록 쥐구멍에 숨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잠시 착각에 빠져 살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일부 라디오의 수기나 일기 같은 정리가 덜 된 글을 발표하는 사람이 간혹 있었지만 웬만해서는 수필가 궤도에 오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미 출간 작가도 있었고 정년퇴직을 한 나이 지긋한 교수님도 있었다. 어떤 수강생은 오래전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강사 선생님이 세월이 흘러 교수가 되어 수업을 한다는 도서관 공고를 보고 설레는 마음으로 수업을 신청했다고 고백했다. 그 수강생 역시 글을 참 잘 썼다.    


어린 시절 경험, 아빠와의 추억, 딸과 있었던 사소한 일, 엄마 이야기 등 소재가 친근하고 읽기가 편안했다. 생각해보니 나는 사적인 글을 제대로 적어본 기억이 없었다. ‘공장 글’만 그런대로 썼을 뿐 내 이야기를 제대로 써보지 못했던 거다. 그런 연유에서 글쓰기 수업시간에 공식적으로 처음 쓴 내 이야기는 힘만 잔뜩 들어가고 읽기가 영 불편했다. 내 이야기를 쓰기 전 내 마음을 곰곰이 들여다보는 일이 먼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버지의 두 아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던 수강생이 있었다. 그는 19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적어냈다. 고등학생 때 호적등본에 적혀 있던 ‘모’ 자리에 엄마 대신 다른 여자의 이름을 보고 아버지에게 다른 아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1.4 후퇴 때 헤어진 북에 있는 아버지의 첫째 아내였다고 한다. 불같이 사랑한 첫째 아내를 끝내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가엽고 평생 제대로 된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한 그의 어머니도 가엽고 애처롭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물 흐르듯 써 내려간 글은 마치 소설책 한 부분을 읽는 듯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 분의 과거 기억을 돈 주고 사고 싶네요. 저는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저렇게 글을 쓸 수 없어요.”    


이미 소설책도 여러 권 낸 소설가이자 연륜이 쌓인 문예창작과 교수님도 쓸 수 없는 글이 있다니. 글이란 게 기술만으로는 결코 자신할 수 없는 분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연>을 쓴 피천득 대 수필가께서도 그러지 않았나.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오, 서른여섯 중년의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고. 진정한 수필을 쓰려면 어느 정도 세상을 알아야 하고 경험도 있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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