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 나와 아들을 연결해주는 한식
먹구름이 잔뜩 끼고 비가 올 것 같은 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날은 엄마가 만들어준 수제비가 딱 먹고 싶다. 비 오는 날 빈대떡이 대중적이지만 나에게는 수제비가 떠오르는 날이다. 수제비는 쌀밥을 딱히 좋아하지 않던 과거 내 입맛에 적당하게 잘 맞았다.
엄마는 커다란 냄비 속에 물을 붓고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냈다. 물이 끓으면 만들어놓은 반죽을 손으로 뜯어 퐁당퐁당 물속으로 집어넣기 바쁘다. 식구가 많아 엄마의 손은 늘 분주하게 움직였다. 어떤 날은 부추를 갈아 넣어 초록색 수제비를 뽑아내기도 했다.
얇게 뽑힌 수제비는 얇은 대로 보들보들 입안에서 춤을 추고 굵게 뽑힌 수제비는 굵은 대로 씹는 맛이 쫄깃쫄깃했다. 색이 맑고 점도는 걸쭉한 국물 또한 입을 즐겁게 해 주었는데 감자 때문인지 밀가루 때문인지 걸쭉해진 국물은 으슬으슬해진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숟가락으로 수제비 국물을 떠먹다 보면 날씨 때문에 우울해진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며 마음의 평온이 찾아온다. 대접에 국물이 줄어들 때마다 엄마는 약하게 불을 줄여 온기가 남은 냄비 속 따뜻한 국물을 그릇에 더 채워 넣어주었다. 식사시간마다 밥 한 공기 비우기가 버거웠던 나는 수제비만큼은 한 그릇 뚝딱 비워내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며 엄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어린 시절 이야기를 토막토막 짧게 들려주곤 했다.
“엄마 어린 시절에는 이거 많이 먹었지.”
중년이 된 나의 어린 시절 엄마, 지금은 내 아이의 외할머니. 그녀의 어린 시절은 꽤 오랜 시간 거슬러 올라간다. 수제비로 시작한 이야기는 엄마 학창 시절 단짝 친구 이야기로 흐르더니 고등학생인 엄마에게 데이트 신청했던 옆집 의대생 오빠 이야기로 빠져버린다. 수제비를 먹으며 엄마는 옛 추억을 떠올리고 나는 엄마의 소녀 시절을 상상해보곤 했다. 엄마의 여고생 모습은 덜렁거리는 나와 사뭇 달리 많이 야무졌을 것 같고 은근히 깍쟁이였을 것도 같다. 수제비를 찰지게 뽑는 엄마의 손맛만 봐도 알 수 있다.
맛집 취재차 서래마을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수제비랑 비슷하게 생긴 음식을 만난 적이 있다. 오너 셰프가 사진 촬영할 메뉴를 설명하면서 호기롭게 뇨끼를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식 수제비라고 생각하면 된다며 빠른 손놀림으로 뇨끼를 만들어내는데 겉모습이 수제비랑 똑같다. 수제비처럼 반죽을 하는데 반죽할 때 감자가 들어가 더욱 쫄깃하다며 맛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수제비 속에 감자를 넣은 거면 감자 수제비 아닌가? 내 눈에는 겉모습이 반반한 뇨끼보다 뜯어지는 대로 모양이 만들어지는 수제비가 더 자유로워 보이고 편안해 보였다. 한국 수제비의 역사가 먼저인지, 이탈리아 뇨끼의 역사가 먼저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인 내 입맛에는 뜨끈한 국물 속에서 흐트러지듯 구수한 자태를 뽐내는 한국산 수제비가 영혼을 위로해주는 음식이다.
“엄마, 수제비가 뭐야?”
그러고 보니 11살 아들을 키우는 동안 수제비를 같이 먹어본 적이 없었나 보다. 오늘 점심 메뉴는 수제비로 결정했다. 아들은 태어나 처음 먹는 수제비가 떡처럼 쫄깃쫄깃하다며 아귀아귀 맛있게 잘도 먹는다. 쫀득하고 보드라운 수제비를 앞에 놓고 나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어린 시절에 비 오거나 추운 날 할머니가 가끔 만들어주셨어.”
아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수제비를 함께 먹게 된다면 설명하기 좋아하는 아들 역시 수제비 이야기를 써먹을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아빠 어린 시절에 할머니 손잡고 가끔 먹던 음식인데 이 수제비가 뇨끼보다 역사가 더 깊은 음식이야”라고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