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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Oct 23. 2022

2번 발레 선생님의 사려 깊은 추임새

몇 년 간 2명의 발레 선생님에게 발레를 배워왔다. 지금은 둘 중 2번 선생님 수업만 듣는다. 그녀들의 티칭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1번 발레 선생님은 입시 무용 가르치듯 수강생과 소통한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는 순간 귀신같이 알아보고 호통을 친다.      


“여기 놀러 나오는 거 아니세요! 집중하고 쭉쭉 늘리세요!”     


강의실은 늘 날이 가득 서있는 목소리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깜박하고 머리끈을 가져오지 못할 때도, 차가 밀려 조금 늦을 때도, 몸이 피곤할 때도, 목을 뺄 때 턱이 같이 올라갈 때도 그녀 앞에서는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머리 풀어헤치지 말고 묶으세요.”

“엉덩이 시루떡처럼 퍼지지 않게 바짝 힘주세요.”

“목만 길게 올리는 거예요. 턱 내리세요!”

“우아하고 아름답게!!”     


말투에 따라 코믹하게 들릴 수 있을 법한 저런 말들이 그녀의 입을 타고 호통과 함께 나온다.  재밌는 건 ‘우아하고 아름답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도 날카롭게 톤이 올라간다. 수업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어떤 포인트에서 언성을 높일지 몰라 옆 눈으로 살짝살짝 그녀의 표정을 살펴가며 발레를 해야 했다.     


1번 발레 선생님은 목소리와 티칭 스타일 빼고는 모든 게 참 여성스러운 발레리나였다. 가느다랗고 긴 뒷 목을 보고 있으면 저런 가녀린 목에서 어떻게 앙칼진 목소리가 나오는 건지 항상 의아했다. 특히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격조 있게 사용하는 몸짓은 물 위에 떠 있는 새하얀 한 마리 학이 연상되곤 했다. 그래서인지 수강생에게도 완벽한 몸동작을 강요하는 걸까.


다른 발레 수업은 어떨까, 궁금증이 생겼다. 그러던 중 2번 발레 선생님을 만나게 된 거다. 2번 발레 선생님은 담백하게 발레 동작을 알려준다. 1번 발레 수업은 속으로 울면서 몸짓은 우아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면 2번 수업은 편안한 마음으로 발레 동작을 할 수 있다.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니 우아한 표정도 절로 나온다. 그렇다고 운동이 안 될 정도로 마냥 편한 건 아니다. 허리가 조금 불편한 날 한 템포 쉬고 있으면 옆으로 다가와 무리가 안 가는 비슷한 듯 다른 동작을 넌지시 알려준다.     


2번 발레 선생님의 티칭 스타일은 편안함이 장점이다. 어디 콩쿠르 나갈 것도 아닌데 힘 좀 덜 주면 어떤가. 그녀의 또 다른 장점은 동작이 조금 어렵다 싶을 때마다       


“잘하셨어요! 잘하고 있어요. 조금만 더 힘내서 해보세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며 칭찬과 응원을 아까지 않는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 엄마 앞에서 첫 걸음마 할 때, 엄마들이 “조금만 더, 조금만 더”하는 것처럼 말이다. 흥을 돋우는 사려 깊은 추임새는 팔다리가 파르르 떨려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힘을 실어준다. 가끔 농담도 잘한다.     


“회원님들, 물건 세일할 때 어떻게 하세요? 나도 모르게 팔을 뻗쳐서 그쪽으로 몸이 가잖아요? 그렇게 팔을 길게 뻗어서 우아하게 오른쪽으로 이동하시는 겁니다.”     


살얼음판 같던 1번 수업과 달리 마스크 뒤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세일 물건 득템 하듯 손을 앞으로 쭉 뻗치지만 동작은 우아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이 포인트다.      


겨울 학기 시작 전까지 한 달 정도 발레 공백이 생겼다. 보통 문화센터 수업은 한 학기에 3개월 진행하는데 2번 발레 선생님은 2개월로 진행, 한 달 쉬고 다음 학기를 시작한다. 무서운 1번 발레 선생님 수업으로 빈 시간을 채워볼까 하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시 발레는 체질에 안 맞는다.      


발레를 배우기 전 사다둔 발레 책을 꺼내 들었다. 2번 발레 선생님의 한 달 빈자리는 이 책으로 채워보기로 했다. 하다 보면 한 달 금방 지나가고 맞춤형 2번 선생님을 곧 만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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