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윽, 또 지각이군’
가을 학기 마지막 수업 시간인데 또 지각하게 생겼다. 아이 등교 준비시키면 8시 40분, 발레수업 시간 10시 20분. 집에서 발레 강의실까지 가는 시간,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 합쳐 30분. 10시 20분에서 30분 빼면 집에서 9시 50분 전 출발. 그렇다면 1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는 건데 발레 가기 전 준비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진다. 어젯밤에 발레 스커트라도 다려놓을 걸, 미리 머리라도 감아둘걸. 늦는 와중에 머릿속만 더 복잡해진다. 에이, 가지 말까.
학교 가는 아이에게 급하게 책가방 챙기지 말고 전날 챙기라고 아침마다 으름장을 놓으면서 나 역시 코앞에 닥쳐 허겁지겁 준비한다. 준비할게 많아 주저앉으려다가도 발레 하는 날이니까 늦더라도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처음이잖아, 많이 늦어봤자 10분. 스스로 다독거린다. 1번 강사 아니니까 가볼 만하다.
손바닥 위에 폼 클렌징과 물을 섞어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고 세수를 한다. 개운하다. 어서어서 준비하자. 칫솔을 들어 치약을 쭉 짜고 위아래로 부지런히 칫솔질을 한다. 음, 뭔가 이상한데. 치약 맛이 좀 쓴가? 겉도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와 결이 다른 쓴맛이다. 아 몰라. 빨리빨리 닦고 나가자. 좀 더 열정적으로 칫솔질을 해본다. 응? 진짜 이상하다. 치약을 쳐다봤다. 은은한 핑크빛이 도는 히말라야 소금 치약이다. 좀 전에 짰던 치약은 뽀얀 하얀색이었는데. 주변을 살펴봤다. 치약은 핑크빛 히말라야 치약 하나뿐이다. 어이쿠, 폼 클렌징으로 열심히 이를 닦고 있었군. 하악하악.
“퉤, 퉤”
그래, 내가 그렇지 모. “네가 애 놓고 사는 게 제일 신기하다”던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나이 들어 그만 덜렁거릴 때도 된 거 같은데 한결같은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에휴, 입안을 물로 여러 번 헹궈 낸 후 심혈을 기울여 핑크빛 치약을 칫솔 위에 올리고 다시 닦는다.
후닥닥 준비를 마치고 난폭 운전 끝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런 날은 엘리베이터도 왜 이리 늦게 오는지, 강의실은 1층 아니고 왜 9층이야. 속으로 엘베 탓, 강의실 탓, 사물 탓하기 바쁘다. 치약만 아니었어도 7분 정도 늦을 텐데 치약 때문에 13분 정도 늦은 거 같다. 강의실 도착하기 전까지 사물 탓하는데 열을 올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수업에 참여해본다. 손바닥은 바닥을 꾹 누르고 발바닥은 바닥을 끌어 위로 올린 후 후~ 하면서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매트 수업이 한창이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제일 힘든 동작이었는데 지각 덕에 반으로 줄어 갑자기 늦게 오길 잘한 거 같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10분 전만 해도 조급증 걸린 사람처럼 조마조마했는데. 구석으로 매트를 쑤셔 넣듯 밀어 넣고 바를 끌고 와 2번 포지션으로 섰다.
“데미 플리에 4번, 업 할 거예요.”
플리에는 발끝을 양 옆으로 향하게 턴 아웃한 후 양쪽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이다. 데미 플리에는 살짝만 구부리기, 그랑 플리에는 깊게 구부려 호흡이 길다. 정면 거울을 예의 주시하며 어깨는 내리고 최선을 다해 목을 길게 뽑은 후 음악에 맞춰 천천히 플리에 동작으로 몸을 풀어준다.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이때 상체는 절대 흐트러지면 안 된다.
“잘하셨어요. 이제 롱드잠 할게요. 배에 힘주고 발끝으로 연결해서 2번 반복”
발을 앞으로 뻗어 앞-옆-뒤 순으로 천천히 정성스럽게 반원을 그리는 롱드잠 동작은 피아노 선율이 격정적이다. 두 번 연속으로 반원을 그리다 앞으로 발을 뻗은 후 학처럼 다리를 구부려 파쎄를 하고 뒤로 발을 뻗어 밸런스를 맞춘다. 학기마다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음악과 몸짓이 하나 되어 물아일체 경지에 이르렀다. 다리를 높게 들어 균형 잡는 건 평생 안될 것 같지만 마음만은 발레리나다. 바를 잡고 롱드잠 동작을 하며 음악에 심취하다 보면 감정 이입이 되면서 사연 있는 여자가 된 기분이다. 발끝으로 반원을 그리는 동작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사연이 있긴 하다. 지각한 사연.
“자, 바뜨망 들어갑니다. 발로 뻥 하고 차세요.”
그랑 바뜨망 동작을 처음 배운 날의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발레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발로 여러 번 뻥 차다 보면 일주일치 스트레스가 싹 날아간다. 함께 나오는 음악 또한 비장하다. 딴, 따다라라 딴, 딴. 두 번째 딴은 ‘쾅’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이때 뻥 차는 타이밍과 맞아떨어진다. 왼발로 중심을 곧게 잡고 무릎 핀 오른발은 최대한 높이 올려 뻥 차면 되는 거다. 앞으로 찼다, 옆으로 찼다, 뒤로 찼다 다시 뒤-옆-앞으로 대차게 발길질을 하며 이때 손은 옆으로 뻗어 알라스콩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알라스콩으로 우아하게 균형을 잡고 무아지경으로 뻥 뻥 차다 보면 어느새 속까지 시원하게 뻥 뚫린다. 발차기를 할수록 품위 있게 스트레스를 날릴 줄 아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다 발레 덕분이다.
사연 있는 여자가 되었다, 발로 뻥뻥 차며 온갖 스트레스 날려버리는 등 발레 하는 시간 동안 내 안의 내면 아이와 점점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 겨울 학기 때는 5분 일찍 여유 있게 가서 스트레칭하며 좀 더 성숙한 발레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