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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Oct 23. 2022

품위 있는 스트레스 해소법


‘윽, 또 지각이군’     


가을 학기 마지막 수업 시간인데 또 지각하게 생겼다. 아이 등교 준비시키면 8시 40분, 발레수업 시간 10시 20분. 집에서 발레 강의실까지 가는 시간,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는 시간까지 합쳐 30분. 10시 20분에서 30분 빼면 집에서 9시 50분 전 출발. 그렇다면 1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있는 건데 발레 가기 전 준비 시간이 빠듯하게 느껴진다. 어젯밤에 발레 스커트라도 다려놓을 걸, 미리 머리라도 감아둘걸. 늦는 와중에 머릿속만 더 복잡해진다. 에이, 가지 말까.      


학교 가는 아이에게 급하게 책가방 챙기지 말고 전날 챙기라고 아침마다 으름장을 놓으면서 나 역시 코앞에 닥쳐 허겁지겁 준비한다. 준비할게 많아 주저앉으려다가도 발레 하는 날이니까 늦더라도 가보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늦은 적은 처음이잖아, 많이 늦어봤자 10분. 스스로 다독거린다. 1번 강사 아니니까 가볼 만하다.      


손바닥 위에 폼 클렌징과 물을 섞어 보글보글 거품을 만들고 세수를 한다. 개운하다. 어서어서 준비하자. 칫솔을 들어 치약을 쭉 짜고 위아래로 부지런히 칫솔질을 한다. 음, 뭔가 이상한데. 치약 맛이 좀 쓴가? 겉도는 거 같기도 하고 평소와 결이 다른 쓴맛이다. 아 몰라. 빨리빨리 닦고 나가자. 좀 더 열정적으로 칫솔질을 해본다. 응? 진짜 이상하다. 치약을 쳐다봤다. 은은한 핑크빛이 도는 히말라야 소금 치약이다. 좀 전에 짰던 치약은 뽀얀 하얀색이었는데. 주변을 살펴봤다. 치약은 핑크빛 히말라야 치약 하나뿐이다. 어이쿠, 폼 클렌징으로 열심히 이를 닦고 있었군. 하악하악.     


“퉤, 퉤”           


그래, 내가 그렇지 모. “네가 애 놓고 사는 게 제일 신기하다”던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나이 들어 그만 덜렁거릴 때도 된 거 같은데 한결같은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에휴, 입안을 물로 여러 번 헹궈 낸 후 심혈을 기울여 핑크빛 치약을 칫솔 위에 올리고 다시 닦는다.      


후닥닥 준비를 마치고 난폭 운전 끝에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이런 날은 엘리베이터도 왜 이리 늦게 오는지, 강의실은 1층 아니고 왜 9층이야. 속으로 엘베 탓, 강의실 탓, 사물 탓하기 바쁘다. 치약만 아니었어도 7분 정도 늦을 텐데 치약 때문에 13분 정도 늦은 거 같다. 강의실 도착하기 전까지 사물 탓하는데 열을 올린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수업에 참여해본다. 손바닥은 바닥을 꾹 누르고 발바닥은 바닥을 끌어 위로 올린 후 후~ 하면서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는 매트 수업이 한창이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제일 힘든 동작이었는데 지각 덕에 반으로 줄어 갑자기 늦게 오길 잘한 거 같다.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간사하다. 10분 전만 해도 조급증 걸린 사람처럼 조마조마했는데. 구석으로 매트를 쑤셔 넣듯 밀어 넣고 바를 끌고 와 2번 포지션으로 섰다.


“데미 플리에 4번, 업 할 거예요.”     


플리에는 발끝을 양 옆으로 향하게 턴 아웃한 후 양쪽 무릎을 구부리는 동작이다. 데미 플리에는 살짝만 구부리기, 그랑 플리에는 깊게 구부려 호흡이 길다. 정면 거울을 예의 주시하며 어깨는 내리고 최선을 다해 목을 길게 뽑은 후 음악에 맞춰 천천히 플리에 동작으로 몸을 풀어준다.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올라갔다. 이때 상체는 절대 흐트러지면 안 된다.


“잘하셨어요. 이제 롱드잠 할게요. 배에 힘주고 발끝으로 연결해서 2번 반복”     


발을 앞으로 뻗어 -- 순으로 천천히 정성스럽게 반원을 그리는 롱드잠 동작은 피아노 선율이 격정적이다.   연속으로 반원을 그리다 앞으로 발을 뻗은  학처럼 다리를 구부려 파쎄를 하고 뒤로 발을 뻗어 밸런스를 맞춘다. 학기마다 여러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음악과 몸짓이 하나 되어 물아일체 경지에 이르렀다. 다리를 높게 들어 균형 잡는  평생 안될  같지만 마음만은 발레리나다. 바를 잡고 롱드잠 동작을 하며 음악에 심취하다 보면 감정 이입이 되면서 사연 있는 여자가  기분이다. 발끝으로 반원을 그리는 동작이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듯한 모양새다. 그러고 보니 사연이 있긴 하다. 지각한 사연.      


“자, 바뜨망 들어갑니다. 발로 뻥 하고 차세요.”     


그랑 바뜨망 동작을 처음 배운 날의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발레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 발로 여러 번 뻥 차다 보면 일주일치 스트레스가 싹 날아간다. 함께 나오는 음악 또한 비장하다. 딴, 따다라라 딴, 딴. 두 번째 딴은 ‘쾅’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이때 뻥 차는 타이밍과 맞아떨어진다. 왼발로 중심을 곧게 잡고 무릎 핀 오른발은 최대한 높이 올려 뻥 차면 되는 거다. 앞으로 찼다, 옆으로 찼다, 뒤로 찼다 다시 뒤-옆-앞으로 대차게 발길질을 하며 이때 손은 옆으로 뻗어 알라스콩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알라스콩으로 우아하게 균형을 잡고 무아지경으로 뻥 뻥 차다 보면 어느새 속까지 시원하게 뻥 뚫린다. 발차기를 할수록 품위 있게 스트레스를 날릴 줄 아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다 발레 덕분이다.        


사연 있는 여자가 되었다, 발로 뻥뻥 차며 온갖 스트레스 날려버리는 등 발레 하는 시간 동안  내 안의 내면 아이와 점점 친해지고 있는 중이다. 겨울 학기 때는 5분 일찍 여유 있게 가서 스트레칭하며 좀 더 성숙한 발레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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