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과일 코너, 말랑말랑 탐스럽게 익은 홍시가 눈을 홀린다. 플라스틱 통에 5개씩 들어있는 홍시 두 묶음을 집어 들었다. 홍시의 빈틈없는 주황빛은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홍시의 계절이 돌아왔구나. 옆집 아줌마의 대봉 봉투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홍시의 맛에 눈 뜨기 시작한 건 불과 1~2년 전이다. 2년 전, 눈인사만 하고 지내던 옆집 아줌마가 커다란 검은색 봉투에 커다란 대봉을 꽉꽉 채워 담아 건네줬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만 받고 싶었으나 정신을 차려 보니 대봉 봉투가 손에 들려있었다. 좋아하지도 않은 대봉을 한, 두 개도 아니고 봉투에 꽉 채워주니 난감했다. 수북이 담긴 대봉 봉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어찌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봉투에서 몇 개만 빼내 작은 봉투에 옮겨 담고 엄마네로 갖다 주었다.
“띵동”
누군가 벨을 누른다. 밝고 경쾌한 옆집 아줌마 목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는 봉투 소리가 들린다. 딱 1년 만이다.
'아, 또 대봉인가 보다. 어쩌지. 지난번처럼 양이 많으면 곤란한데. 집에 없는 척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벨소리가 한 번 더 울린다.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대봉이 한가득 담긴 봉투가 그녀 손에 들려있다.
“아,, 안녕하세요.”
“우리가 시골에서 많이 따왔거든. 이거 먹어요.”
“아,, 네,, 두고 드시지. 지난번에도 주셨는데..”
“우리도 엄청 많아. 그냥 먹으면 떫으니까 뒀다 두고 먹어요.”
안 좋아한다는 말을 했어야 했나. 인심 좋은 그녀는 뒤도 안 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옆집 대문 속으로 들어간다. 1년 만에 내 손에 들린 대봉 봉투를 보니 또 난감해진다. 지난해에 받은 대봉도 엄마네 갖다 주고 몇 개 안 남은 것조차 썩어서 버렸는데. 음, 일단 숙성이나 해볼까. 봉투에 그대로 두었다 처참한 말로를 맞이한 과거 대봉과 옆집 아줌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다시 받은 대봉에 정성을 들여 보기로 했다.
봉투에서 대봉을 꺼내 부엌 쪽 베란다 창틀에다 키친타월을 깔고 가지런하게 올렸다. 바람이 통하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다시 줄을 맞췄다. 줄 지어 자리 잡은 주황빛 대봉을 보니 그런대로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 같아 나쁘지 않았다. 으응? 이상하게 볼수록 정이 간다. 하루에도 여러 번 부엌을 드나들며 숙성되어 가는 대봉들을 보니 스멀스멀 애정이 샘솟는다. 고집스럽게 딱딱했던 대봉이 물렁물렁한 홍시로 탈바꿈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며칠이 지났을까. 어느덧 그중 하나가 홍시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했다. 칼로 반을 갈라 숟가락으로 퍼서 입에 넣었다. 물컹하고 달달한 홍시 속살이 혀를 타고 미끄러지듯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린다. 오, 잘 익었네. 생각보다 야무지게 숙성이 잘 됐더라. 내가 심고 키운 감나무도 아닌데 먹을수록 내 입으로 들어오는 홍시들이 기특하다. 대봉을 숙성하며 기다림의 미학을 체득한 것인가.
달콤한 홍시가 입 속으로 꿀떡꿀떡 멈추지 않고 잘도 들어온다. 홍시로 변해가는 대봉들을 하루에 한, 두 개씩 순차적으로 먹으며 며칠을 보냈다. 홍시와 함께 따뜻한 마음으로 늦가을을 맞이하다 보니 처음 가졌던 마음과 달리 다음 해 가을에도 옆집 아줌마가 또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슬금슬금 생긴다.
마트에서 홍시를 집어 들자마자 옆집 아줌마와 대봉 봉투가 떠오른 이유가 구구절절하다. 올해는 소식이 없네. 안 좋아했던 걸 눈치 채신 걸까. 저, 지금은 좋아해요. 재작년부터 대봉이랑 썸 좀 타다 작년부터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옆집 아주머니 덕분에 홍시를 좋아하게 됐는데 왜 소식이 없으셔요. 오다가다 옆집을 바라보며 꺼내지도 못할 말들을 속으로 여러 번 되뇌어 본다. 옆집 대문은 아무 말 없이 굳건하게 닫혀있다.
이제야 비로소 대봉을 홍시로 숙성시켜 먹는 재미를 알게 됐는데 나한테 왜 이래요. 이럴 거면 아예 주지나 말지. 며칠을 마음속으로 대봉에 집착하다 정신을 차렸다. 대봉 홍시 대신 마트 홍시도 그런대로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그래도 먹는 재미는 숙성시켜가며 먹는 대봉이 더 맛깔나긴 하다.
대봉에 대한 미련을 애써 외면한 지 며칠이 지났다.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 대문 앞에 먹음직스러운 대봉이 양파 자루에 담겨있다. 그 옆은 넉넉하게 담긴 단감 봉투가 사이좋게 앉아있다. 오홋, 옆집 아주머니가 내 마음의 소리를 들으셨나 보다. 갓난아기 안아 올리듯 대봉과 단감 봉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집으로 들어왔다. 반질하게 생긴 단감 하나를 깎아 칼로 반듯하게 잘라 접시에 담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입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사각사각 씹히는 질감이 흥겹다. 달달한 맛은 혀끝에 여운을 남긴다. 이야, 이렇다면 대봉 홍시 맛이 더욱 기대됩니다요.
거룩한 마음으로 창틀에 키친타월 깔고 양파 자루에 담긴 대봉을 꺼내 가지런하게 줄을 맞춘다. 종교의식을 하듯 마음이 경건해진다. 얘들아, 오랜만이다. 올해도 아름다운 숙성 부탁해. 대봉이 홍시로 되어가는 중간 길목 즘에 떡 상자 하나 들고 옆집 초인종을 눌러야겠다. 작년처럼 인사 치례가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대봉 홍시야, 그동안 몰라봐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