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끝에 닿는 11월 차가운 공기에 몸이 움츠려 든다. 손발이 시리고 목도 시리다. 옷 정리를 하며 스카프와 머플러를 꺼냈다. 두툼한 겨울옷 사이에서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끊임없이 스카프가 나온다.
20대 나는 스카프에 꽤 진심이었고 페이즐리 무늬가 상징인 E 사 스카프를 애용했다. 하늘하늘 실크 소재의 봄 여름 스카프, 따뜻한 울 캐시미어 소재의 가을 겨울 스카프 등 계절에 맞게 착용할 수 있는 스카프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었다.
여러 장의 스카프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여행 나갈 때면 면세점 스카프 매장을 기웃기웃거렸다. 매장 셀러들의 “어머 고갱님, 너무 잘 어울려요. 딱 고갱님 거네요. 우아하세요”라는 영업용 멘트를 진심이라 여기며 카드를 건넸다. 아이 낳고 사들인 밍크 머플러보다 자주 두르고 다녔으니 호갱보다는 가치 있는 소비였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남들이 보기에 큰 차이 없이 비슷해 보이는 걸 사들인다는 거다.
<돈지랄의 기쁨과 슬픔>을 펴낸 신예희 작가의 말처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랄을 스카프로 하고 있었다. 스카프를 향한 나의 마음은 늘 갸륵했다. 옷은 유행에 맞춰 아무데서나 사도 스카프만은 아무데서나 사지 않았다. 미세하게 다른 소재의 차이를 손끝으로 느끼는 촉감이 황홀했다. 스카프 한 장으로 심심하고 밋밋한 패션이 완성되는 것 같아 짜릿함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 낳고 손이 한창 많이 가던 시기, 스카프를 할 수도 없고 두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목이 시리면 목폴라를 입으면 되고 적당히 따뜻한 머플러를 둘둘 감으면 그만이었다. 관심을 끊은 지 10년 정도 지난 어느 날부터 스카프가 다시 눈에 들어오더라. 유행을 안 탈것 같은 스카프도 의외로 유행에 민감한 아이템이란 걸 깨달았다. 눈에 차는 스카프를 고르기 위해 홈페이지에 들어가는 수고와 백화점, 아웃렛 매장에 갈 때마다 스카프 코너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머릿속은 스카프에 대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중 언니 목을 감싸고 있는 L 사의 스카프가 눈에 들어왔다. 넘칠 듯 넘치지 않은 화사함을 연출하는 패턴이 맘에 들었다. 블랙 앤 화이트 바탕에 금빛 무늬가 들어간 스카프는 L사의 시그니처 로고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실히 반영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그 로고가 살짝 눈에 거슬리긴 했지만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언니와 똑같은 스카프를 구매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봄기운을 타고 같은 디자인의 핑크빛 스카프를 추가 구매했다.
참 신기한 게 몇 개월 전에 그렇게 예뻐 보이던 핑크빛 스카프가 계절 탓인지 지금은 손이 안 간다는 거다. 그런 경험 나만 있는 거 아니죠? 다들 있잖아요. 그런 몹쓸 경험. 생각해보니 봄에도 딱히 착용하진 않았다. 구매 당일 도파민이 최고조에 이른 것 외에 그 스카프로 재미 본 게 없다. 언니 말대로 색이 너무 고운 나머지 ‘한복 느낌’을 주는 은은한 핑크빛 스카프는 즐겨 입는 블랙 원피스보다 전통 한복에 더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나의 아름답고 갸륵한 소비 활동은 스카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액세서리를 향한 마음도 언제나 그랬다. 액세서리는 108 번뇌하듯 오랜 시간 심사숙고하고 언니들의 조언도 들어가며 일 년에 한 번, 몇 년에 한 번씩 조심스레 구매하는 소비 품목이다. 충동구매를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들어온 순간 흥미가 떨어지는 희한한 체험을 한 이후로 자제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주인장 취향과 내 취향이 비슷하다고 느낀, 철마다 들락날락 거리는 인터넷 의류 쇼핑몰이 있는데 어느 날부터 그녀가 착용한 액세서리에도 눈길이 가더라. 판매하는 옷 외에 코디하는 가방과 액세서리는 당연히 명품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사이트를 찬찬히 보니 함께 착용한 액세서리도 판매하고 있었다. 여리여리한 크림톤 블라우스에 스타일링한 작은 진주알이 콕콕 박힌 귀걸이가 눈길을 끌었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귀걸이를 구매했다. 이 가격에 이런 분위기가 나오다니, 감동스럽고 만족스러웠다.
주인장의 고급진 눈썰미와 센스에 박수를 보내며 이후로도 몇 개의 귀걸이와 가을에 어울리는 스카프 한 장을 더 구매했다. 그녀 덕분에 근시안적 쇼핑 스펙트럼이 물꼬를 트고 자유롭게 유영 중이다. 명품은 희소성과 함께 장인의 손길이 묻어나 좋은 거고, 공장형 가성비 아이템은 손쉽게 내손으로 들어오니 편해서 좋은 거다. 무엇을 소비하든 결국 자기만족 아닌가 싶다. 봄기운에 취해 사 들인 L사의 핑크빛 스카프는 당근에 내놨고 아무리 아름다운 지랄이라도 더욱 신중을 기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