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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일린 Jul 09. 2024

사춘기 아들과 편의점 컵라면 나눠먹는 낭만

중학교 입학 후 치른 첫 시험에서 아이가 기묘한 점수를 받아 들고 왔다. 수학 빼고 나머지 모든 주요 과목, 국어 영어 과학 모두.




중간고사 시험지를 움켜쥐고 처음엔 아이 탓을 했고 다시 생각해 보니 내 탓도 상당 부분은 있었다. 근거 없이 오만방자하게 사춘기 아이를 믿어준 내 탓이었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를 속으로 중얼대며 첫 중간고사의 쓴맛을 처절하게 감내해야 했다.    

 

하여 기말고사 때 다른 과목은 몰라도 국어만큼은 내가 어떻게든 해봐야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과외 학생 가르치는 심정으로 아이를 붙잡고 가르쳐 보기로 다짐했다. 남의 아이 가르치는 것보다 내 아이 가르치는 게 어렵다는 건 잘 알고 있으나 그동안 갈고닦은 티칭 실력으로 남의 아이다, 생각하고 가르쳐 보기로 한 것이다.

      

몇몇의 매운맛 학생들을 접해본 경험이 드디어 빛을 발휘할 날이 온 것이리라. 너 정도는 내가 눈감고도 가르쳐 보겠노라며 당당하게 선포했다.     


“앞으로 국어는 엄마랑 같이 해보자. 엄마가 가르치는 학생들 국어 성적이 다 좋아.”        


아들에게 호기롭게 한마디 던진 후 서점에 들락날락거렸다. 자습서와 문제집을 구입하고 신나게 그것을 풀어재끼기 시작했다. 왜 진작 중간고사를 살뜰히 살펴봐주지 못했을까, 학원 선생님만 너무 믿었나, 하는 하나마나 한 생각을 틈틈이 해가며 문제풀이에 열을 올렸다.     


개념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지문을 음미하며 자습서를 살펴보았다. 아니, 음미했다기 보단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전투태세로 지문을 읽어나갔다. 문제집을 몇 번 풀어본 후 아이의 국어를 가르칠 준비가 충분히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가 잘 따라와 주기만 하면 기말고사는 문제없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기말까지 시간이 충분하니 천천히 잘 가르쳐 보자.      


학원 갔다 온 아들을 붙잡아다 식탁에 앉히고 국어 자습서를 펼쳤다. 밥 먹는 시간 외 우리 집 식탁은 나의 노트북과 여러 권의 책, 더불어 국어 자습서와 문제집이 얽히고설켜 손만 뻗으면 곧바로 학습에 들어갈 만발의 준비가 되어있는 스터디카페 책상으로 변모해 나갔다   


처음엔 잘 따라왔다. 양심은 있는지 중간고사 때처럼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투덜투덜거리며 사춘기 특유의 본성이 드러났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얼굴 근육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뱄었다.       


“아니, 학원에서 이미 다 한 걸 왜 또 해야 해요?”

“야! 너, 중간고사 때 잊었어? 그때와 철저하게 다른 태도로 공부를 해야 하는 거야. 공부는 반복이야. 국어도 반복을 해야지. 한번 봤다고 끝이 아니라고!”     

아들의 불성실한 태도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목소리가 올라갔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조절이 되지 않았다. 그를 가르치기 위해 팔목이 아플 정도로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문제를 풀었던 지난 시간들이 아까웠다.       


분명 남의 아이라고 스스로 가스라이팅하며 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는 내 아이가 되어있고 나는 그의 엄마로 돌아왔다. 전형적인 현실 모자관계가 되어있는 우리의 관계를 목도하며 그를 가르치는 것보단 그냥 내가 국어 시험을 봐주는 게 더 현실적이지 싶었다.


가르치는 건 남의 아이만 가르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속으로 몇 번 마음이 갈팔질팡한 끝에 내린 결론은 지나친 개입보다 아이가 물어보면 대답해 줄 정도만 개입하는 걸로 방향을 잡았다.     




기말 시험이 손에 꼽을 정도로 얼마 남지 않은 일요일, 식탁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그는 국어 문제를 풀고 나는 원고를 끄적거린다. 아이는 공부 끝에 찾아온 쾌감을 맛봤는지 채점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후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연다.      


“엄마, 컵라면 먹고 싶지 않아요?”

“편의점 갈까?”     


편의점에 가서 아들은 컵라면과 삼각김밥을 집어 들고 나는 쫀득이 2개를 집어 들었다. 편의점 한편에 자리 잡은 탁상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아들이 말을 꺼낸다.      


“예전에 캠핑 갔을 때 비 오는 날, 라면 먹었잖아요. 그때 진짜 맛있었는데.”

“우리 비 안 오는 날은 밖에 파라솔에서 먹어볼까? 캠핑장에서 먹는 기분 나겠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사춘기 아들이랑 편의점에서 라면 먹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꽤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그래, 시험 한번 망쳤다고 그게 뭐 대수냐. 앞으로 맞는 학습법 찾아 차근차근 실력 쌓아가면 되는 거지 모. 편의점 컵라면 하나에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며칠 후,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다행히 그의 점수는 더 이상 기묘하지 않았다. 아이는 노고가 고스란히 묻어난 아름다운 시험지를 들고 왔다.     


“엄마,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 봐. 열심히 하니까 좋은 결과가 나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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