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연구소] 멈춤의 지도 — 걸림은 무엇이 아닌가

by 한경수

닮은 멈춤들

걸림이라는 말은 일상에서도 쓰이고 다른 자리에서도 비슷한 말이 있다. 그래서 그냥 두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단어가 된다. 윤곽이 흐려진다.


이 글은 걸림이 무엇인가를 깊이 파는 글이 아니다. 걸림이 무엇이 아닌가를 짧게 짚는 글이다. 닮은 멈춤들 사이에 걸림을 놓아보면, 걸림의 윤곽이 한 번 또렷해진다. 깊이는 없다. 지도만 있다.


머리 쪽의 멈춤 — 의문도 아니고 의심도 아니다

의문(疑問)은 물음의 형태를 갖춘 멈춤이다. 답을 향해 간다. 답이 오면 멈춤은 끝난다. 걸림은 다르다. 걸림은 아직 물음이 되지 않았다. 답이 없어도 걸림은 걸림으로 남는다.


의심(懷疑)은 대상을 틀렸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멈춤이다. 공격적이다. 데카르트의 의심이 그렇다. 걸림은 판단 이전에 일어난다. 옳고 그름을 묻기 전이다. 의심이 칼이라면 걸림은 멈춤 자체다.


둘 다 생각의 일이다. 걸림은 그 한 자리 아래에서 일어난다.


끌림 사이의 멈춤 — 호기심도 매혹도 아니다

호기심(好奇心)은 능동적인 끌림이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가서 잡으려 한다. 걸림은 가지 않는다. 걸림은 그것이 와서 박히는 일이다. 호기심은 새로운 것을 향하지만, 걸림은 평생 봐온 것에서도 일어난다. 어느 날 갑자기.


매혹(魅惑)은 자기를 밖으로 끌고 가는 힘이다. 어딘가로 가게 만든다. 걸림은 정반대다. 자기를 안으로 멈춰 세우는 힘이다. 둘 다 자기 의지로 시작되지 않는다는 점은 닮았다. 그러나 매혹은 가게 하고 걸림은 서게 한다.


걸림은 가는 일이 아니라 서는 일이다.


일상의 멈춤 — 거슬림도 충격도 아니다

거슬림은 밀어내고 싶은 멈춤이다. 빨리 치우고 다음으로 가고 싶다. 걸림은 머물고 싶은 멈춤이다. 거기서 한 번 더 보고 싶다. 방향이 정반대다.


그런데 묘한 자리가 있다. 거슬림이 며칠 묵으면 걸림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짜증나던 것이 어느 날 다시 떠오르면서 진짜 물음이 되는 일. 거슬림이 익으면 걸림이다. 그래서 거슬림을 너무 빨리 치우는 것은 위험하다. 익을 시간을 안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충격(衝擊)은 강도가 크지만 곧 잊힌다. 사람은 충격에서 회복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걸림은 강도가 작아도 사라지지 않는다. 충격이 지진이라면 걸림은 신발 안의 모래알이다. 모래알은 작아도 며칠 가도 잊히지 않는다.


걸림은 얼마나 센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가는가다.


지도의 가운데

여섯 짝을 한꺼번에 늘어놓으면 한 가지가 보인다. 걸림은 멈춤의 한 종류인데, 다른 멈춤들과 미묘하게 결이 다르다.


머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끌고 가지 않는다. 강도가 아니라 지속이다. 자기가 부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걸림은 자기가 부른 적 없는, 서 있는, 사라지지 않는 멈춤이다.


이 한 문장을 지도의 가운데에 박아둔다. 다음 비교편들은 이 가운데서 시작해서 한 자리씩 깊이 들어갈 것이다. 인지부조화와는 어떻게 다른가. 집착으로는 어떻게 변하는가. 깨달음과는 어디서 만나는가. 그 자리들은 지도가 아니라 길이 된다.


지도와 길은 다른 일이다. 지도는 어디가 어디인지 보여주고, 길은 한 자리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다. 오늘은 지도까지만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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