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한마디를 한다. 내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어긋나는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어긋나는 말이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살짝 답답해진다. 무언가가 안 맞는다.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이 빠르다. 너무 빨라서 자기도 잘 못 본다. 머릿속에서 곧바로 반박할 거리가 떠오른다. "저 사람은 나를 잘 모른다." "저 사람은 지금 기분이 안 좋아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저 사람은 원래 그런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한 가지가 안 통하면 다음 것이 떠오른다. 몇 초 안에 가슴의 답답함이 사라진다. 사라졌다는 것은 그 말이 해소되었다는 뜻이다. 이제 다시 평온해졌다.
그 평온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이 글이다.
심리학자 페스팅거(L. Festinger)는 1950년대에 한 가지를 발견했다. 사람은 자기 안에서 모순된 두 가지가 동시에 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일종의 불편한 압력이 생기고, 사람은 그 압력을 빨리 줄이려 한다. 그가 이것을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 cognitive dissonance)라고 불렀다.
해소하는 방법은 대체로 세 가지다.
첫째, 자기 생각을 바꾼다. 가장 정직한 길이지만 가장 드물게 일어난다.
둘째, 상대를 깎아내린다. "저 사람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정보의 출처를 무효화하면 정보 자체가 무효가 된다.
셋째, 그 사실 자체를 잊는다. 며칠만 지나면 그 말은 머릿속에서 사라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쓴다. 빠르고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빠름과 편함이 사실 무서운 자리다.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를 보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자기 안에는 아무것도 새로 들어오지 않는다.
인지부조화 이론의 함의를 한 줄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사람은 불편함을 빨리 해소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그 해소는 대체로 진실을 향해 가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심리학의 발견이다. 이 발견은 정확하다. 그런데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이 이론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를 말하지만,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는가는 말하지 않는다. 빨리 해소하는 것이 본능이라면, 그 본능을 거슬러보는 일은 무엇인가. 거기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심리학은 그 자리에서 멈춘다.
그 자리에서 한 발 더 가는 것이 이 글의 일이다.
걸림은 인지부조화와 같은 자리에서 시작한다. 자기 안의 무언가와 어긋나는 것이 들어왔을 때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 순간. 거기까지는 똑같다.
그런데 다음 동작이 정반대다. 인지부조화는 그 답답함을 해소하려 한다. 걸림은 그 답답함을 해소하지 않고 두려 한다. 인지부조화는 닫으려는 힘이고, 걸림은 닫지 않으려는 힘이다. 같은 자리에서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이건 참는 일이 아니다. 참는 일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겁다. 걸림은 그저 해소를 미루는 일이다. 반박할 거리가 떠올라도 곧바로 반박하지 않는다. 상대를 깎아내릴 핑계가 떠올라도 곧바로 그것을 잡지 않는다. 잊어버리려는 마음이 일어나도 잊지 않으려고 한 번 더 떠올린다. 그것뿐이다. 그런데 그 그것뿐이 결정적이다.
답답함이 며칠 동안 가지 않는다. 그게 좋은 신호다. 며칠 가는 동안 그 안에서 무언가가 익는다. 처음에는 단순히 거슬리던 말이 어느 날 다른 모습으로 다시 떠오른다. 어쩌면 저 사람이 본 자리가 내가 못 본 자리일 수도 있다는 자리가 처음 열린다.
그것이 열리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인지부조화의 빠른 해소는 그 시간을 안 준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걸림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닫으려 한다. 걸림은 닫지 않는 쪽으로 한 번 더 손을 움직이는 일이다. 본능에 거슬리기 때문에 걸림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평생 한 번도 걸려보지 않고 살 수도 있다. 그에게는 모든 어긋남이 인지부조화이고, 모든 인지부조화는 곧바로 해소된다. 그래서 그는 평온하다. 그러나 그 평온함 안에서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바깥에서 온 무언가를 받아들인 적이 없다.
심리학은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인지부조화 이론은 그 정확한 지도다. 그러나 그 지도 위에는 한 자리가 비어 있다. 해소하지 않고 머무는 사람의 자리. 페스팅거는 그 자리를 그리지 않았다. 그릴 이유가 없었다. 그건 통계적으로 드물기 때문이다. 본능에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비어 있는 자리가 걸림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학문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매번 어긋남이 올 때마다, 곧바로 해소하려는 손을 한 번 더 멈춰 세우는 일. 그 한 번의 멈춤이 쌓이면 사람의 결이 달라진다.
마지막에 짧게 한 줄을 더 두고 싶다. 불편함은 해소되지 않아도 된다. 해소되지 않은 채로 며칠을, 몇 주를, 몇 달을 가지고 있어도 된다.
사실은 그래야 무언가가 들어온다. 빨리 평온해지는 사람과 오래 답답해하는 사람 중에서, 자기 안이 더 자라는 쪽은 후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