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연구소] 걸려야 트인다

by 한경수

화두라는 자리

옛 선사(禪師)들은 제자에게 답을 주지 않았다. 답 대신 한 가지를 주었다. 답할 수 없는 물음 하나. 그것을 화두(話頭)라고 불렀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는가, 없는가. 한 손으로 손뼉을 치면 어떤 소리가 나는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너의 본래 모습은 무엇인가.


이 물음들에는 답이 없다. 답이 없도록 만들어졌다. 제자는 그 물음을 받아들고 며칠을 헤맨다. 며칠이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된다. 그 사이 제자는 그 물음을 풀려고 한다. 그러나 풀리지 않는다. 답할 수 없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풀리지 않음 자체가 길이라는 점이다. 선사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풀리지 않는 물음을 건넸다. 답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걸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깨달음은 닫히는 일처럼 보인다

여기서 한 가지가 이상하다.

겉으로 보면 걸림과 깨달음(覺)은 정반대처럼 보인다. 걸림은 열리는 일이다. 자기 안에 없던 자리가 한 번 열리는 사건이다. 무엇이 더 모호해지는 자리에 가깝다. 반면 깨달음은 닫히는 일처럼 보인다. 무엇이 분명해지는 사건이다. 헤매던 사람이 문득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이는 경험. 그래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헤매지 않는다고 한다. 더 이상 묻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걸림과 깨달음은 정반대다. 한쪽은 열고, 한쪽은 닫는다. 한쪽은 묻게 하고, 한쪽은 묻기를 그치게 한다.


그런데 화두를 다시 보자. 화두의 길은 정반대다. 걸려야 트인다. 답할 수 없는 물음 앞에서 오래 막혀 있어야 어느 날 그 막힘이 풀린다. 막힘 없이 풀린 것은 진짜 풀린 것이 아니다. 그래서 화두에서는 깨달음이 걸림에서 시작된다. 걸리지 않은 사람은 깨닫지도 못한다. 이건 그냥 비유가 아니다. 천 년 동안 선 전통이 발견해온 사실이다.


여기서 의문이 한 자리 일어난다. 깨달음이 닫히는 일이라면, 어째서 그 길이 걸림에서 시작되는가. 열리는 일에서 닫히는 일이 어떻게 나오는가.


닫히는 깨달음과 열리는 깨달음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깨달음은 닫히는 일이라고 부른 것이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깨달음이라는 말 안에는 두 가지 결이 섞여 있다. 하나는 답을 얻는 일이다.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일. 헤매던 자리에서 정답을 손에 쥐는 일. 이것은 분명히 닫히는 일이다. 잡으면 더 이상 묻지 않는다. 그리고 잡고 나면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된다. 이것이 "걸림과 집착" 편에서 말한 집착으로 변한 깨달음이다. 큰 깨달음일수록 큰 손잡이가 되고, 큰 손잡이는 잡기 좋고, 잡기 좋으면 손이 닫힌다.


또 하나는 답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묻기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묻고 답하는 그 구도(構圖) 자체가 풀리는 일. 풀고자 하는 자기와 풀어야 할 대상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일. 이것은 닫히는 일이 아니다. 더 깊이 열리는 일이다. 잡을 손이 더 이상 없기 때문에 손이 영원히 열린 채로 남는다.


선 전통에서 진짜 견성(見性)이라고 부른 것은 후자에 가깝다. 답을 손에 쥐는 일이 아니라, 손에 쥘 답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일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더 평온해 보이지만, 그 평온은 모든 물음을 닫은 평온이 아니다. 모든 물음 앞에서 손을 열어둔 평온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은 걸림의 반대가 아니다. 깨달음은 걸림이 끝까지 간 자리다. 걸린 사람이 그 걸림을 풀려고 손을 자꾸 움직이다가, 어느 날 손을 움직이는 일 자체를 그치는 자리. 거기서 일어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사사무애의 자리

화엄(華嚴)에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라는 말이 있다. 풀어 말하면 일과 일 사이에 걸림이 없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 말을 처음 들으면 묘한 모순이 느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걸림이 좋은 것이라고 말해왔다. 걸려야 사유가 시작되고, 걸려야 자기가 자라고, 걸려야 트인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화엄은 걸림이 없는 자리가 가장 깊은 자리라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가.


사실 둘은 같은 말이다. 걸림이 없다는 것은 걸릴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걸리는 것이 그대로 있되, 그것이 다른 것의 길을 막지 않는다는 뜻이다. 걸림이 풀어진 것이 아니라, 걸림이 통과될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걸려 있으면서 동시에 트여 있는 자리. 그것이 사사무애다.


다시 화두로 돌아가 보자. 제자가 화두를 풀어낸 순간은 화두가 사라진 순간이 아니다. 화두는 그대로 있다. 다만 그것이 더 이상 길을 막는 것이 아니게 된 것이다. 막힘이 막힘이면서 동시에 길이 된 자리. 걸림이 걸림이면서 동시에 트임이 된 자리.


이것을 "걸림과 집착" 편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손이 닫힌 채로 열려 있는 자리다. 손이 무언가를 잡고 있되,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다른 것을 막지 않는 자리. 평범한 사람의 손은 잡으면 닫히고 열면 놓는다. 그런데 사사무애의 자리에서는 잡음과 놓음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본 자리다.


이 자리에 닿았다고 말할 자격은 나에게 없다. 다만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가 걸림의 끝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 이 두 가지만은 분명히 짚어두고 싶다.


다시 일상의 자리로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일상으로 가져오면 무엇이 남는가.


대부분의 사람에게 깨달음은 너무 큰 단어다. 화두를 들고 평생 수행하는 일은 보통 사람의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이 말하려 한 것은 그 큰 사건이 아니다. 작은 걸림 하나하나가 이미 그 길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오늘 어떤 문장 앞에서 멈춘 사람이 있다. 며칠 동안 그 문장이 떠올랐다. 풀리지 않았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작은 화두를 들고 있는 줄 모른다. 화두라는 단어를 모른다. 그러나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천 년 전 선방(禪房)에서 일어난 일과 형식이 같다. 답이 없는 물음 앞에서 손을 열어둔 채 머무는 일. 그것이 자기 안에서 익기를 기다리는 일.


그래서 걸림은 작은 화두다. 작은 화두가 쌓이면 사람의 결이 바뀐다. 큰 깨달음 한 번이 아니라, 작은 걸림 백 번이 한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그 백 번을 거친 사람은 어느 날 걸림이 트임이 되는 자리를 한 번 짧게 본다. 길게 머물지는 못한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한 번 본 자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평생 그 사람의 등을 받친다.


걸려야 트인다. 그리고 트인 사람은 더 잘 걸린다. 이것이 걸림과 깨달음의 진짜 관계다. 정반대가 아니라 같은 일의 두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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