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면 틀리는 숫자] 온실에서는 바람이 불지 않는다

by 한경수

태도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하려면, 먼저 그것이 어디에서 오지 않는지부터 말해야 한다. 태도는 수업에서 오지 않는다. 커리큘럼에서 오지 않는다. 학점에서 오지 않는다. 그러면 어디에서 오는가. 바람에서 온다.


바깥의 바람이다.

어떤 식물은 바람을 맞고 자란다. 바람에 흔들리는 과정에서 줄기가 굵어지고 뿌리가 깊어진다. 바람이 없으면 줄기는 가늘게 자라고 뿌리는 얕게 퍼진다. 바람을 한 번도 맞지 않은 식물은 자기가 약한 줄 모른다. 비교할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가 약한 줄 모르는 식물은 바람 앞에 섰을 때 왜 자기가 휘청이는지도 모른다. 휘청이는 것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실은 바람이 없던 곳에서 자란 것이 원인인데.


대학은 온실이다.

이 비유가 거슬린다면 다른 말로 바꿔도 된다. 제도 안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고, 인증된 보호구역이라고 해도 좋다. 어떻게 부르든 핵심은 같다. 대학이라는 공간은 학생을 어떤 종류의 바람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설계돼 있다. 설계자들이 그렇게 의도한 것이 아니다. 제도가 돌아가는 방식 자체가 그런 효과를 낳는다.


왜 그런가. 제도는 측정되는 것 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학점이 있다. 학위가 있다. 졸업요건이 있다. 인증평가가 있다. 취업률 통계가 있다. 이 모든 장치는 "측정 가능한 것"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장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들어오지 못하면 다뤄지지 않는다. 다뤄지지 않으면 가르쳐지지 않는다. 가르쳐지지 않으면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통계를 다루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잠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기 손을 멈출 줄 아는 감각은 측정되지 않는다. 시험 문항으로 만들 수 없다. 루브릭에 올릴 수 없다. 졸업요건에 넣을 수 없다. 취업률 통계는 이 감각을 가진 학생과 가지지 못한 학생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감각은 장치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들어오지 못하니 커리큘럼에서 빠진다. 빠진 게 아니라 애초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자리가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층이다.


두 번째 층은 더 근본적이다. 학위라는 것은 국가가 보증하는 증서다. "이 사람은 일정 수준을 통과했다"는 약속이다. 이 약속이 작동하려면 "일정 수준"이 표준화되어야 한다. 표준화되려면 측정되어야 한다. 측정되지 않는 것은 약속의 내용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학위는 구조적으로 "측정 가능한 최저선을 넘었다"는 사실 이상을 보증하지 않는다. "실력이 있다"를 보증하지 않는다. 애초에 보증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데 학생도 학부모도 교수도 심지어 사회도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구별할 필요를 못 느낀다. 졸업장은 똑같이 나오니까. 취업은 이루어지니까. 세상은 돌아가니까. 그래서 "최저선 통과"가 "실력"으로 조용히 바꿔치기된다.


4년 동안 바람 한 번 맞지 않고 통과해 온 학생이 "나는 통계 분석을 할 줄 안다"고 믿게 된다. 그 믿음은 학생의 허영이 아니다. 제도가 그렇게 말해 준 것이다. 학점과 학위라는 장치가 "당신은 통과했다"고 찍어 준 것이고, 학생은 그 도장을 실력의 증거로 읽은 것이다. 다른 읽기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캡스톤 발표장의 세 장면으로 돌아간다.


산점도의 x축에 왕의 순번을 놓은 학생. 상자그림의 다섯 숫자를 또박또박 읊기만 한 학생. 데이터에 섞인 한자를 세 번이나 지나친 학생. 나는 이 장면들을 처음 보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


4학년이 어떻게 이럴 수 있나.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충격을 받은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 세 장면은 예외가 아니라 정상적인 산출물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없는 온실에서 4년 동안 자란 식물이 바람 앞에서 휘청이는 것은 예외가 아니다. 기대되는 결과다. 제도가 설계된 대로 작동한 결과다.


학생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학생이 정상이다. 온실이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정상적인 산출물을 낳은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이 산출물을 이상하다고 느끼는 내 감각이다. 그 감각은 내가 어디에선가 다른 종류의 바람을 맞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고, 그 감각이 없었다면 나는 학생의 발표를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 글의 가장 불편한 지점이 있다.

나는 37년 동안 이 온실 안에서 가르쳤다. 온실 바깥에 선 사람이 온실을 비판하는 글이 아니라, 온실 안에서 37년을 보낸 사람이 온실에 대해 쓰는 글이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나는 이 제도의 수혜자였고 운영자였다. 내 강의 계획서는 학점이라는 장치 안에서 짜여 있었고, 내 시험 문항은 측정 가능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내 성적표는 표준화된 수치로 제출되었다. 나는 온실의 일부였다. 그리고 그 온실이 낳은 산출물을 보고 지금 충격받고 있다. 이 충격을 온전히 학생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지만, 가장 부정직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모른다. 정말 모른다. 온실을 부수자는 말은 무책임하다. 온실은 필요하다. 어떤 학생들에게는 온실 안의 4년이 인생을 바꾸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온실의 존재가 아니라 온실 안에 창문이 없다는 것이다. 바람이 한 번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람이 들어오는 창문을 내는 일은 제도 전체를 뒤엎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가 수업 중간에 "잠깐, 이게 뭐지"라고 자기 손을 멈추는 순간을 한 번이라도 학생 앞에서 보여 준다면, 그 순간이 창문이 된다. 한 번이라도 학생에게 "네가 지금 쥐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준다면, 그 질문이 바람이 된다.


그 창문은 커리큘럼 안에는 없다. 커리큘럼은 측정되는 것으로만 채워져 있으니까. 창문은 커리큘럼의 바깥에서 열려야 한다. 바깥에서 열 수 있는 사람은 한 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뿐이다. 자기 자신이 한 번쯤 바람을 맞아 본 사람. 바람의 기억이 있는 사람만이 바람이 없는 공간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바람을 한 번도 맞아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온실을 온실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연재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한 학생이 산점도의 x축에 왕의 순번을 놓았다. 그 장면은 학생 한 사람의 실수가 아니었다. 제도가 수십 년에 걸쳐 정밀하게 만들어 낸 결과였다. 그 결과를 앞에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그 장면이 왜 거기 있었는지, 누구의 잘못이 아니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어떤 구조가 있었는지를 기록하는 일이다. 이 다섯 편의 글이 그 기록이다.


온실 안의 식물은 자기가 약한 줄 모른다. 바깥 바람을 맞아 본 적이 없으니까.

이 문장을 쓰는 내가 그 바람을 충분히 맞았는지, 그것도 나는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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