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면 틀리는 숫자] 파이프는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by 한경수

셋은 같은 뿌리에서 자랐다고 썼다. 그 뿌리의 이름을 말하려 한다.


의심의 부재다. 돌려 말할 필요가 없다.

통계 분석은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여러 단계가 이어진 흐름이다. 데이터를 모으고, 정제하고, 살펴보고, 그림으로 그리고, 해석한다. 이 흐름을 우리는 파이프라인이라고 부른다. 파이프라인이라는 말에는 한 가지 전제가 들어 있다. 앞 단계의 산출물이 뒤 단계의 입력이 된다는 것. 그래서 앞에서 새어 나온 것은 뒤에서 잡을 수 없다. 앞 단계가 엉망이면 뒤 단계는 엉망 위에 정교함을 쌓는 일이 된다. 정교할수록 더 엉망이 된다.

세 학생의 세 장면을 이 파이프라인 위에 다시 놓아 본다.


수집 단계에서 "이 데이터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학생이 있었다. 웹에서 긁어온 자료에 한자가 붙어 있는데도 지나쳤다. 앞 단계에 낯선 것이 있었지만 그것을 낯설다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각화 단계에서 "이 축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은 학생이 있었다. 왕의 순번을 x축에 놓고 산점도를 그렸다. 도구가 받아주는 입력을 도구가 받아주지 않아야 할 입력인지 묻지 않았다. 해석 단계에서 "이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묻지 않은 학생이 있었다. 상자그림의 다섯 숫자를 또박또박 읊었지만 그림 앞에 선 적은 없었다.


세 사람이 세 단계에서 각각 한 번씩 멈추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한 학생이 혼자서 수집도 하고, 시각화도 하고, 해석도 했다고. 결과는 달라졌을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족한 것이 단계별 기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심은 기술이 아니다. 태도다.

수집의 의심법, 시각화의 의심법, 해석의 의심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잠깐,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고 자기 손을 멈출 줄 아는 한 가지 감각이 있고, 그 감각이 파이프라인의 어느 지점에서든 똑같이 작동한다. 그 감각이 있는 사람은 수집할 때도 멈추고, 그림 그릴 때도 멈추고, 해석할 때도 멈춘다. 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어느 지점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부재는 한 곳에만 생기는 구멍이 아니다. 전체를 관통한다.

파이프가 한 군데 새면 고칠 수 있다. 그 지점을 찾아 막으면 된다. 그런데 파이프 전체가 종이로 만들어져 있다면 어느 지점을 막아도 소용이 없다. 옆에서 또 젖고, 또 찢어지고, 또 무너진다. 소재 자체가 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집 수업을 보강하고, 시각화 수업을 추가하고, 해석 수업을 신설해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단계가 아니라 재질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 자신에게 돌아와야 한다.

37년을 가르쳤다. 수집하는 법을 가르쳤다. 분석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그런데 "잠깐, 이게 뭐지"라고 자기 손을 멈추는 감각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가. 시간을 따로 내서, 한 학기의 한 장을 비워서, 그 감각만을 다룬 적이 있었는가. 없었다. 그 감각은 수업 중간중간에 "그런데 말이야"로 끼워 넣는 여담이었지, 한 번도 수업의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시험에 나오지 않으니까. 채점표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커리큘럼의 한 칸을 차지할 명분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학생들이 그 감각을 가지고 4학년이 된다면 그것은 내가 가르쳐서가 아니다. 학생 스스로 어딘가에서 만난 누군가가, 혹은 학생 자신이 무언가에 한 번 걸려 넘어진 경험이, 그 감각을 길러 준 것이다. 만나지 못하고 넘어지지 못한 학생은 그 감각 없이 4학년이 된다. 그리고 캡스톤 발표장에 선다. 그 발표장에서 내가 본 것은 학생의 실력이 아니라 학생이 거쳐 온 4년의 흔적이다.


태도는 어디에서 오는가. 기술은 수업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런데 태도는 수업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경로로 만들어진다. 그 경로가 4년 내내 막혀 있었다면, 막혔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모르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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