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으면 틀리는 숫자] 점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by 한경수

앞의 글에서 한 학생의 산점도에 대해 썼다. 한 장이라고 썼지만 사실은 두 장이었다. 그때 나는 두 장 중 한 장에 대해서만 말했고, 두 장이 함께 놓였을 때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보인다.


학생은 산점도를 두 장 그렸다.

첫 번째 그림의 y축은 왕의 수명이었다. 두 번째 그림의 y축은 후궁의 수명이었다. 두 그림의 x축은 같았다. 왕의 대수였다.

첫 번째 그림에 대해서는 앞의 글에서 이미 썼다. x축의 거리가 거리가 아니라는 문제. 이름표를 측정값인 척 취급했다는 문제. 그 문제는 지금도 유효하다. 다만 첫 번째 그림에는 그래도 이해할 여지는 남아 있었다. 왕과 왕의 대수는 일대일로 대응한다. 한 점이 한 사람이다. 어느 점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기술의 층에서 오류가 있을 뿐, 그림은 그림으로서 서 있을 수는 있었다.


그런데 학생은 첫 번째 그림을 그린 다음 두 번째 그림으로 넘어갔다. y축을 왕의 수명에서 후궁의 수명으로 바꿨다. 그리고 x축은 바꾸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이 한 줄이 이 글의 전부다.

학생이 두 번째 그림의 x축을 새로 고른 것이 아니다. 고르지 않았다. 첫 번째 그림에서 쓴 x축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관성이었다. 한 번 쓴 것이 다음 자리로 그대로 흘러간 것이다. 흘러가는 사이에 "잠깐, 그림이 바뀌었는데 x축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학생에게 두 그림이 같은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그림처럼 보였다는 뜻이다.

두 그림은 같은 그림이 아니다. 첫 번째 그림에서 한 왕의 자리에는 한 점이 찍힌다. 두 번째 그림에서 한 왕의 자리에는 점이 여러 개 세로로 쌓인다. 그 왕에게 기록된 후궁이 여럿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왕의 자리에는 점이 하나도 찍히지 않는다. 기록된 후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로로 점이 뭉친 자리와 텅 빈 자리가 번갈아 나타난다. 이것은 첫 번째 그림과 전혀 다른 모양이다. 같은 산점도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다르다. 첫 번째 그림이 한 줄로 걸어가는 산책이라면, 두 번째 그림은 어떤 자리에 사람이 몰리고 어떤 자리에는 한 명도 없는 광장이다. 그림의 의미가 다르고 그림의 모양도 다르다.


그런데 학생에게는 같아 보였다. 왜냐하면 화면에 뜨는 시각적 형식이 같았기 때문이다. 둘 다 산점도처럼 생긴 무언가가 화면에 떴으니까. 학생은 그림을 의미로 읽지 않고 형식으로 읽었다. 산점도 모양이면 산점도였다. 그 안에 무엇이 담겼는지는 다음 문제였고, 다음 문제는 오지 않았다.


두 번째 그림의 y축을 생각해 본다.

후궁의 수명이라는 y축은 단순한 숫자의 열이 아니다. 조선의 후궁은 기록에 이름이 남기도 했고 남지 않기도 했던 사람들이다. 생몰년이 미상으로 처리된 사람이 많고, 폐위된 후궁은 기록 자체가 삭제되기도 했다. y축에 올라간 것은 기록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명단이다. 기록에 남은 사람의 이름 옆에 붙은 숫자가 점이 되어 화면 위에 흩어진다. 그 점 하나하나가 한 사람의 삶의 길이다.


이 y축 앞에 서면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 y축이 x축을 만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성의 삶이 남성의 순번 위에 얹혔다. 한 여성의 수명이 어느 왕의 자리에 찍힐지는 그 여성이 어느 왕의 후궁이었는지로 결정됐다. 후궁이라는 사람을 후궁이 아니라 어느 왕의 누구로 정렬한 것이다. 산점도에는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은 y축에 올라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을 어떻게 정렬할지는 x축이 결정한다. 주인공이 후궁이라면 후궁의 무엇으로 정렬해야 한다. 출생연도, 입궁한 해, 품계, 수명 자체의 순서. 선택지가 많다. 그중 어느 것을 골랐어야 하는가는 학생이 무엇을 묻고 싶었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데 학생은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르지 않았다. 앞 그림에서 쓴 x축이 그대로 흘러 내려왔다.


주인공을 주인공이 아닌 것으로 정렬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한다고 했지만, 화면 위에는 남성의 순번이 뼈대를 이루고 있었다. 점들은 그 뼈대 위에 얹혀 있을 뿐이었다. 뼈대가 주인이고, 점은 장식이었다. 이 뒤바뀜은 학생이 의도한 것이 아니다.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무겁다. 의도하지 않은 뒤바뀜은 그 뒤바뀜을 가능하게 한 구조가 이미 학생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학생의 손에 들어온 구조는 웹에서 긁어온 원자료의 구조였을 것이다. "몇 대 왕의 누구의 후궁"이라는 형식으로 정리된 표. 학생은 그 표를 받아서 그대로 그렸다. 받아서 그렸다는 것이 곧 동의한 것이다. 의심하지 않은 것이 곧 동의한 것이다. 표를 만든 사람의 세계관이 학생의 그림으로 그대로 흘러 들어왔다. 데이터는 중립이 아니다. 데이터에는 만든 사람의 시선이 들어 있다. 그 시선을 읽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데이터를 받으면, 그 시선을 그대로 퍼뜨리는 확성기가 된다. 학생은 확성기였다. 자기가 확성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확성기였다.


여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간다.

같은 실수를 한 번 하는 것과 두 번 하는 것은 증거로서 다르다. 한 번은 실수일 수 있다. 두 번은 습관이다. 습관은 실수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나온다. 학생이 x축을 첫 번째 그림에서 잘못 골랐다면 그것은 한 번의 판단 미스다. 그런데 학생은 고른 것이 아니었다. 고르지 않고 가져다 쓴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그림에서 한 번 더 가져다 썼다. 한 번의 판단 미스가 아니라 판단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판단이 있어야 할 자리에 관성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 관성은 학생 한 사람의 관성이 아니다. 도구가 그 관성을 허락하고, 수업이 그 관성을 문제 삼지 않고, 발표장이 그 관성을 지나쳐 보내 온 4년의 관성이다.


점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학생은 멈췄을 것이다.

첫 번째 그림에서 한 점이 한 왕의 삶이었듯이, 두 번째 그림에서 한 점은 한 여성의 삶이다. 왕의 삶과 여성의 삶이 같은 뼈대 위에 얹힐 수 있는지를 학생은 물었어야 했다. 이 물음이 한 번이라도 머릿속에 일어났다면, 두 번째 그림의 x축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첫 번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 사이에서 학생의 손은 멈췄을 것이다. y축을 바꿨으면 x축도 다시 물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당연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손은 멈추지 않았다. 점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은 점이었을 뿐, 사람이 아니었다.


그 발표장에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시간이 없었고, 말할 언어가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앞의 글을 쓸 때도 나는 첫 번째 그림만을 보고 있었다. 두 번째 그림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두 그림이 같은 x축을 공유한다는 사실이 따로 무게를 가진다고 느끼지는 못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이 따로 보였다. 그리고 그 사실이 보이고 나서야, 앞의 글에서 내가 쓴 "x축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질문 뒤에 "y축이 누구냐"라는 질문이 있었어야 했고, 그 질문 뒤에 다시 "두 그림 사이에서 왜 멈추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이 있었어야 했다. 질문은 한 번에 다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를 던지고 나서야 다음 하나가 보인다. 나에게 이 며칠이 필요했다.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의 실천이기도 하다. 앞의 글을 다시 읽고, 거기에 무엇이 빠졌는지 묻는 일. 이 일을 학생에게 요구하려면 나부터 먼저 해야 한다. 학생에게 네 그림을 다시 봐라라고 말하려면, 나도 내 글을 다시 봐야 한다. 다시 보고 나서, 빠진 층이 있었다면 그것을 쓰는 것이 이 연재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 글이 그 글이다.


점이 사람으로 보였다면 두 그림은 다른 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두 그림이 다른 그림이 되었다면, 같은 x축을 공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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