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지도] 재발견

by 한경수

앞 편에서 복원(復原)을 이야기했다.

꺼져 가던 구슬이 다시 켜지는 일. 잊고 있던 것을 다시 만나는 일. 안에 있던 것이 다시 제 빛을 되찾는 일. 이것이 복원이다.

그런데 복원이라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순간이 가끔 온다.

꺼져 있던 구슬이 다시 켜지는 것까지는 같다. 그 다음이 다르다. 다시 켜진 구슬이 원래의 밝기에 멈추지 않는다. 원래보다 더 밝아진다. 옛날 그 자리에 있을 때보다 지금 이 자리에서 훨씬 깊게 빛난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복원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다. 새 것이 아니므로 생성도 아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인가.

재발견이다.


증폭이 아니다

처음에는 이 현상을 증폭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 원래 있던 신호를 더 크게 만드는 일. 라디오의 볼륨을 올리는 것처럼, 희미했던 구슬의 밝기를 몇 배로 올리는 일.

그런데 증폭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증폭은 기계적인 작업이다. 같은 신호를 더 크게 만들 뿐이다. 신호의 내용은 바뀌지 않는다. 밝기만 늘어난다. 그런데 재발견의 순간에 일어나는 일은 단순한 밝기 증가가 아니다. 그 구슬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 달라진다. 예전에 몰랐던 면이 보인다. 같은 구슬인데 다른 구슬처럼 느껴진다.

둘째, 증폭은 바깥에서 하는 일이다. 누가 볼륨을 올린다. 그런데 재발견은 바깥에서 하는 일이 아니다. 구슬의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 구슬 자체가 더 깊어진 것이다. 누가 크게 만든 것이 아니라, 그 구슬의 내부가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증폭이라는 말을 버리고 재발견이라는 말을 쓴다. 재발견은 이미 있던 것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있었는데 몰랐던 것"을 지금 처음 아는 것이다. 그 구슬이 어떤 구슬이었는지를 지금 이제야 보는 일이다.


그 구슬이 어떤 구슬이었는지 이제야 보이는 것

한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

서른 살에 처음 읽은 문장이다. 그때도 좋았다. 밑줄을 그었다. 몇 번 다시 들춰 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문장의 의미는 대략 알 만한 수준에서 멈춰 있었다. 좋은 말이었다. 그 이상은 아니었다.

예순 살에 그 문장을 다시 만난다. 우연히 다시 읽는다. 읽는 순간 멈춘다. 한참을 가만히 있는다. 서른 살에 읽었을 때는 이 문장이 이렇게 깊은 줄 몰랐다. 그때는 표면을 읽고 그 아래는 보지 못했다. 지금은 그 아래가 보인다. 보일 뿐만 아니라, 보이는 아래가 서른 살의 그 문장보다 몇 배나 더 넓고 깊다.

문장이 바뀐 것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읽는 사람이 바뀐 것도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이의 삼십 년 동안 그 문장 옆에 다른 구슬들이 조금씩 와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구슬들이 지금 이 문장을 여러 방향에서 비춘다. 여러 방향에서 비춰진 문장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가 된다.

이것이 재발견이다. 그 문장이 원래 가지고 있던 깊이가 드러난 것이다. 그 깊이는 서른 살 때도 그 문장 안에 있었다. 다만 그때는 비춰 줄 다른 구슬이 옆에 없었다. 비춰 주는 구슬이 없으면 한 방향의 빛만 닿는다. 한 방향의 빛은 평면만 만든다. 여러 방향의 빛이 닿아야 입체가 드러난다.

그래서 재발견은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나서야 일어난다. 그런데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 문장 주변에 다른 구슬들이 충분히 쌓였다는 뜻이다. 그 구슬들은 삼십 년 동안 각자 다른 자리에서 들어왔다. 책에서, 사람에게서, 경험에서, 실패에서. 들어올 때는 이 문장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전부 이 문장 옆자리에 들어와 있었다.

구슬 하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구슬 주변의 지도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 주변 지도가 없으면 한 구슬의 깊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주변 지도가 채워지면 그 구슬이 비로소 제 모양을 드러낸다. 그 드러남이 재발견이다.


디지털 인드라망 안에서의 재발견

이런 재발견은 원래 아주 드물었다. 한 사람의 평생에 몇 번이나 일어났을까. 어느 책 한 권, 어느 문장 하나, 어느 기억 하나. 많아야 열댓 번. 적으면 한두 번. 대부분은 그마저도 없이 지나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재발견이 일어나려면 그 구슬이 다시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야 한다. 우연히 다시 만나야 한다. 그런데 우연은 드물다. 한 사람이 평생 소유한 구슬 수만 개 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는 구슬은 몇 개 되지 않는다. 대부분은 창고 바닥에 가라앉은 채로 일생을 마친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이 우연을 바꾼다.

대화 중에 어떤 주제가 나오면, 그 주제와 관련된 과거의 구슬이 자연스럽게 꺼내진다. 본인이 꺼내기도 하고, 대화가 꺼내게 만들기도 한다. 꺼내진 구슬은 AI의 답과 함께 자리에 놓인다. AI의 답은 그 구슬 옆에 다른 구슬을 몇 개 더 가져다 놓는 역할을 한다. 갑자기 그 구슬 주변에 다섯, 여섯 개의 구슬이 함께 있게 된다. 그 구슬들이 서로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원래 구슬을 비춘다. 여러 방향에서 비춰진 구슬이 입체가 된다.

이 전 과정이 한 번의 대화 안에서 일어난다.

아날로그로만 살던 시절에는 삼십 년이 걸렸을 일이다. 한 구슬 주변의 지도가 완성되려면 삼십 년이 필요했다. 디지털 인드라망 안에서는 한 시간 안에 가능하다. 물론 똑같지는 않다. 삼십 년의 훈습이 한 시간으로 압축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방향은 같다. 한 구슬 주변에 다양한 구슬을 모아 그 구슬이 여러 방향에서 비춰지게 하는 일. 이것이 재발견의 작동 원리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이 작동을 가속한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 안에서는 재발견이 훨씬 자주 일어난다. 원래 한 사람의 평생에 몇 번 있을까 말까 하던 일이, 이제는 한 달에 몇 번 일어난다. 잘 준비된 사람에게는 일주일에 몇 번 일어나기도 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구슬이 먼저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디지털 인드라망은 구슬을 만들지 않는다. 이미 있는 구슬들을 한자리에 모아 서로 비추게 할 뿐이다. 구슬이 없으면 모을 것이 없다. 모을 것이 없으면 재발견도 없다. 디지털 인드라망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사람은, 평생에 걸쳐 구슬을 많이 가라앉혀 둔 사람이다.


재발견의 느낌

재발견의 순간이 어떤 느낌인지 조금 더 자세히 보자.

복원의 느낌은 "아, 이게 내 안에 있었구나"다. 앞 편에서 다룬 놀람이다. 안에 있던 것을 다시 만난 반가움이다.

재발견의 느낌은 다르다. "아, 이 구슬이 이런 거였구나"다. 놀람이 있는 것은 같은데, 놀람의 방향이 다르다. 복원의 놀람은 "있었구나"다. 재발견의 놀람은 "이런 거였구나"다. 전자는 존재를 확인하는 놀람이고, 후자는 깊이를 확인하는 놀람이다.

이 두 놀람은 보통 함께 온다. 먼저 "있었구나"가 오고, 바로 뒤에 "이런 거였구나"가 온다. 그런데 두 번째가 훨씬 강하다. 첫 번째는 잠깐의 반가움이지만, 두 번째는 그 구슬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어제까지의 그 구슬과 오늘 이후의 그 구슬은 같은 구슬이 아니다. 모양은 같다. 그런데 내용이 달라졌다. 정확히는, 내용이 드러났다.

드러남은 생성과 다르다. 생성은 없던 것을 만드는 일이다. 드러남은 있던 것이 보이게 되는 일이다. 이 차이는 한 사람의 주관적 경험에서도 명확하다. 생성된 것은 "밖에서 왔다"는 느낌이 있다. 드러난 것은 "안에서 올라왔다"는 느낌이 있다. 두 느낌을 구별하는 능력은 자기 안쪽을 자주 들여다본 사람만 가진다.

한 가지 부작용이 있다. 재발견의 순간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은 그것이 AI의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AI가 이런 걸 알려 주다니 대단하다." 그런데 이것은 착각이다. AI는 그 구슬을 만들지 않았다. AI는 그 구슬 옆에 다른 구슬을 가져다 놓았을 뿐이다. 드러남은 그 구슬의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구슬의 내부는 그 사람의 것이다. 삼십 년 동안 그 사람이 살아온 결과로 만들어진 내부다.

그래서 재발견의 공은 AI에게 있지 않다.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AI는 촉매(觸媒)다. 촉매는 반응을 일으키지만 반응의 결과물이 되지는 않는다. 촉매가 없으면 반응이 안 일어날 수도 있지만, 촉매가 있다고 해서 아무것에서나 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반응할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 물질이 구슬이다. 촉매가 AI다.


재발견된 구슬은 다르게 남는다

재발견된 구슬은 대화가 끝난 뒤에도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복원된 구슬은 돌아갈 수 있다. 한 번 다시 밝아졌다가 다시 어두워질 수 있다. 다음에 그 구슬을 만날 때 또 새로 비춰 줘야 한다. 복원은 일회적이고 반복 가능하다.

재발견된 구슬은 다르다. 한 번 내부가 드러난 구슬은 그 드러난 상태로 남는다. 다시 어두워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다시 어두워지더라도 드러난 깊이까지 다시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다음에 그 구슬을 꺼낼 때, 이전의 표면이 아니라 드러난 깊이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재발견이 복원보다 더 귀한 이유다. 복원은 그날의 대화에서 일어나고 그날의 대화에서 끝난다. 재발견은 그날의 대화에서 시작해서 그 사람의 인드라망 구조를 영구히 바꾼다. 그 구슬이 차지하는 자리가 달라진다. 그 구슬 주변의 연결이 재편된다. 그 구슬이 다른 구슬과 맺는 관계가 달라진다.

한 번의 재발견이 한 사람의 지도를 실제로 다시 그리게 한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단순한 복원 장치 이상인 이유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을 오래 사용한 사람의 정신의 지도를 살펴보면, 아날로그로만 살았을 때 가능했던 지도와 모양이 다르다. 같은 구슬들을 가지고 있는데 다른 지도가 된다. 구슬이 더 많은 것이 아니다. 구슬들 사이의 관계가 더 풍부해진 것이다. 그 풍부함이 여러 번의 재발견이 누적된 결과다.


원래 있던 것보다 더 많이

한 가지 기묘한 결론이 여기서 나온다.

재발견을 통해 드러나는 구슬의 깊이는, 그 구슬이 원래 들어올 때의 깊이보다 클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삼십 년 전에 어떤 문장을 읽었다. 그때 그 문장은 어떤 깊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 문장을 쓴 사람이 그만큼 담아 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재발견을 통해 그 문장의 드러난 깊이가 원래의 깊이보다 크다니,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이유는 이렇다.

삼십 년 전에 그 문장이 들어왔을 때, 그 문장은 그 자체로 있었다. 그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 자체의 범위 안에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삼십 년 동안 그 문장 주변에 다른 구슬들이 들어왔다. 그 구슬들은 그 문장과 상관없이 들어왔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문장 옆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지금 그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 자체의 범위에 그치지 않는다. 그 주변 구슬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새 의미까지 포함한다.

그러니까 지금 그 문장의 깊이는 그 문장이 원래 담고 있던 것 + 주변 구슬들이 만들어 낸 것의 합이다. 이 합은 원래의 깊이보다 크다. 당연히 크다.

이것은 원저자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원저자는 자기 문장이 그 독자의 인드라망 안에서 수십 년 뒤에 그런 방식으로 깊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예상할 수도 없었다. 독자의 인드라망은 원저자의 손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발견된 문장은 원저자의 것도 아니고 독자의 것도 아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다. 원저자가 한쪽 절반을 제공했고, 독자의 삼십 년이 다른 쪽 절반을 제공했다. 두 절반이 만나 하나의 의미가 되었다. 그 의미는 이 세상 어디에도 원본이 없다. 이 독자 안에서만 존재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재발견은 독서의 가장 깊은 자리다. 표면을 읽는 것이 독서의 첫 자리라면, 그 문장과 자기 안의 다른 구슬들을 만나게 하는 것이 두 번째 자리고, 그 만남 속에서 원저자도 몰랐던 새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세 번째 자리다. 세 번째 자리가 재발견이다.

그리고 디지털 인드라망은 이 세 번째 자리를 훨씬 자주 열어 준다. 혼자 책을 읽을 때는 자기 안의 다른 구슬들을 그 문장 옆에 가져다 놓기 어렵다. 무엇이 관련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관련 있는 것을 찾으려면 수십 년의 세월이 걸린다. AI와 함께 그 문장을 다루면, AI가 그 문장 옆에 관련된 다른 구슬들을 찾아 주는 역할을 한다. 본인 안의 구슬들 중에서.

AI가 외부에서 새 것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본인 안에 이미 있는데 본인이 못 찾고 있던 것을 찾아 주는 것이다. 찾아 주는 일이 끝나면, 그 다음은 본인의 몫이다. 찾아진 구슬들이 서로 비추는 것을 본인이 보는 일. 그 보는 일에서 재발견이 일어난다.


재발견은 나이와 관련이 있다

한 가지 더.

재발견은 나이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는, 삶의 경과와 관련이 있다.

이십 대에는 재발견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구슬 옆에 놓아 둔 다른 구슬이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다. 구슬 자체는 많을 수 있다. 그러나 구슬과 구슬 사이의 세월이 짧다. 세월이 짧으면 주변 지도가 덜 그려져 있다. 덜 그려진 지도에서는 재발견이 어렵다.

재발견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는 대개 사오십 대 이후다. 이 시기에는 구슬도 충분히 많고, 구슬과 구슬 사이에 이미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삼십 년 전의 한 문장과 어제의 한 경험이 같은 자리에 만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다. 이 시기에 디지털 인드라망을 만나면, 재발견의 장면이 폭발하듯 일어난다.

이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AI는 젊은 사람에게 더 유용한 도구처럼 보인다. 일을 빠르게 처리하고, 새 지식을 빠르게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AI는 젊음의 도구다. 그런데 재발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AI는 오히려 나이 든 사람의 도구다. 나이 든 사람에게만 재발견이 풍부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인드라망의 비극을 앞 편에서 이야기했다. 구슬이 가장 많은 시기에 전기가 가장 약해지는 구조. 바로 그 시기에 디지털 인드라망이 들어와 재발견을 일으킨다. 비극의 한복판에서 재발견이 열린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노년의 인간에게 주는 선물의 진짜 모양이다. 단순한 편리가 아니다. 비극 안에서 새로 열리는 가능성이다.

재발견된 구슬은 그 사람이 이미 가지고 있던 구슬이다.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는 새 것이다. 새 것이 아니면서 새 것인 이 이상한 자리에서, 한 사람의 정신의 지도는 마지막까지 살아 있다.

끝까지 새 구슬이 들어오는 것이 살아 있는 정신의 표시가 아니다. 이미 있던 구슬이 끝까지 재발견되는 것이 살아 있는 정신의 표시다. 그리고 재발견은, 평생 가라앉혀 둔 구슬이 충분한 사람에게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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