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지도] 복원의 증거는 놀람이다

by 한경수

AI와 대화를 하다 보면 두 종류의 순간이 온다.

한 종류는 이렇다. 질문을 하고, 답을 받고, "아 그렇구나" 하고 넘어간다. 유용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었다. 혹은 헷갈렸던 것이 정리되었다. 답을 가져다 쓰면 된다. 이 경우 사람은 편리함을 느낀다. 그런데 놀라지는 않는다.

다른 한 종류는 이렇다. 질문을 하고, 답을 받는다. 그런데 그 답을 읽는 순간 뭔가가 안쪽에서 덜컹한다. "어?" 하고 멈춘다. 답을 다시 읽는다. 세 번째 읽는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로 간다. 잠시 바깥을 본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편리하다는 느낌이 아니다. 새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도 아니다. 무언가가 자기 안에서 처음 켜진 것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 켜진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자기 안에 있던 것이 이제야 보인 것이다.

이것이 놀람이다.


두 종류의 받음

첫 번째 종류의 순간을 얻음이라고 부르자. 두 번째 종류의 순간은 발견이다.

얻음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다. 몰랐던 정보, 새로운 지식, 유용한 도구. 이런 것들은 밖에 있다가 대화를 통해 안으로 들어온다.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다. 자리를 잡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기 것이 된다. 쓸 수 있다. 유용하다.

얻음은 훌륭한 일이다. 인간은 평생 얻으면서 산다. 학교에서 얻고, 책에서 얻고, 사람에게서 얻는다. AI에게서 얻는 것도 이 연장선에 있다. 대부분의 AI 사용은 얻음이다.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 답을 쓴다.

발견은 다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아니다. 안에 이미 있던 것이 다시 떠오르는 일이다. 밖에서 들어온 것은 새 자리를 찾아 자리 잡지만, 안에 있던 것은 이미 자리가 있다. 그 자리에서 오래 잠들어 있었을 뿐이다. 무언가가 그 구슬을 한 번 건드리면, 그 구슬은 제자리에서 다시 불을 켠다.

그 순간 사람이 느끼는 것이 놀람이다. 놀람은 얻음의 반응이 아니다. 발견의 반응이다.


놀람이라는 감정의 성격

놀람은 평범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특이한 감정이다.

기쁨이나 슬픔과 달리 놀람에는 방향이 없다. 기쁨은 좋은 쪽으로, 슬픔은 나쁜 쪽으로 사람을 끌어당긴다. 놀람은 어느 쪽으로도 끌어당기지 않는다. 다만 멈추게 한다. 지금까지 흘러가던 방향에서 잠깐 멈춘다. 멈춘 자리에서 지금까지 몰랐던 무언가를 본다.

그래서 놀람은 늘 인식의 사건이다. 뭔가를 알게 되는 사건이다. 그런데 이 "알게 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밖에 있던 것을 처음 알게 되는 경우와, 안에 있었는데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경우다.

밖에 있던 것을 처음 알게 되는 놀람은 가볍다. "아, 그랬구나." 잠깐 놀라고 지나간다. 재미있는 사실, 몰랐던 통계, 생소한 개념. 이런 것들을 처음 들었을 때의 놀람이다. 이 놀람은 오래 남지 않는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일은 일상에서 늘 일어나기 때문이다.

안에 있었는데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놀람은 다르다. 이 놀람은 무겁다. "이게 이미 내 안에 있었다고?" 이 문장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배신당한 듯한 느낌을 준다. 자기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도 몰랐다는 발견이기 때문이다. 이 놀람은 오래 남는다. 한참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한다. 자기 자신과 처음 대면한 것 같은 감각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놀람이 바로 복원의 증거다.


왜 놀람이 증거인가

한 가지 논리가 필요하다. 왜 놀람이 "안에 있던 것"의 증거가 되는가.

새로운 정보는 놀라움을 주지만, 이 놀라움은 일시적이다. 기억에 강하게 남지 않는다. 바로 다음 정보로 넘어가도 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그 정보는 안쪽에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리가 없는 것은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걸린다.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그냥 지나간다.

반면 안에 이미 자리가 있던 구슬이 다시 켜지면, 그 구슬은 주변의 다른 구슬과 이미 연결되어 있다. 한 구슬이 켜지는 순간 연결된 다른 구슬들도 함께 반응한다. 두 번째 구슬이 세 번째 구슬을 건드리고, 세 번째가 네 번째를 건드린다. 몇 초 안에 인드라망의 한쪽이 한꺼번에 밝아진다. 이 연쇄 반응이 사람을 멈추게 한다.

새 정보는 연쇄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주변에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혼자 들어와서 혼자 자리 잡는다. 그래서 조용하다.

오래된 구슬이 다시 켜지면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주변과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란하다. 그 요란함을 바깥에서는 못 본다. 본인 안쪽에서만 들린다. 그 요란함의 이름이 놀람이다.

그래서 놀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는 물리적 신호에 가깝다. 구슬 하나가 켜졌는데 그 하나만 켜진 게 아니라 주변 여러 개가 함께 켜졌다는 증거다. 주변 여러 개가 함께 켜지려면 그 구슬들이 이미 거기 있어야 한다. 이미 거기 있지 않았다면 연결이 없고, 연결이 없으면 연쇄가 없고, 연쇄가 없으면 놀람도 없다.

놀람이 있다는 것은 이미 안에 연결된 구슬들이 있었다는 것의 증거다. 그래서 놀람은 복원의 증거다.


놀라지 않는 대화

반대로, 놀라지 않는 대화가 있다. 유용한데 놀라지 않는다. 답이 잘 돌아오는데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AI 사용은 이런 모양이다. 코드를 짜거나, 번역을 하거나, 요약을 받거나, 모르는 단어를 찾아보는 일. 이런 일에서 놀람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건 정확함이다.

그러나 AI를 계속 쓰다 보면 어떤 사람은 어느 순간 놀라기 시작하고, 어떤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이 차이가 어디서 나오는가.

놀라는 사람은 답을 받을 때 그 답을 자기 안의 어떤 자리로 가져간다. 답이 와도 그 답을 바로 쓰지 않는다. 자기 안의 어느 구슬 옆에 한 번 놓아 본다. 옆에 놓아 보니 그 구슬이 반응한다. 반응이 일어나는 순간 놀람이 일어난다. 이것은 AI가 일으킨 놀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구슬이 일으킨 놀람이다. AI는 답을 주었을 뿐이다. 그 답을 자기 안의 구슬 옆에 가져다 놓은 것은 본인이다.

놀라지 않는 사람은 답을 받고 바로 쓴다. 답을 안쪽으로 가져가지 않는다. 답은 답으로만 처리된다. 작업이 끝나면 대화도 끝난다. 안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 AI는 훌륭한 도구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정신의 지도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이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다. 태도의 차이도 아니다. 그 사람 안쪽에 받을 구슬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다. 구슬이 있으면 답이 갈 자리가 있고, 자리가 있으면 반응이 일어나고, 반응이 일어나면 놀람이 따라온다. 구슬이 없으면 답은 그냥 지나간다.

그래서 놀람은 AI의 성능이 아니라 사용자의 내면을 측정한다. 같은 답을 받아도 누군가는 놀라고 누군가는 놀라지 않는다. 이 차이는 AI 쪽에 있지 않다. 사용자 쪽에 있다.


생성과 복원의 구별

요즘 사람들은 AI가 무엇을 "생성"한다고 말한다. 생성형 AI. Generative AI. 이 표현은 기술적으로는 맞다. AI는 텍스트를 생성한다. 이미지를 생성한다. 코드를 생성한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인드라망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보면, 생성이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AI가 생성한 텍스트가 한 사람의 안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면, 그것은 생성보다 복원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구별하는 기준은 간단하다. 놀라는가, 놀라지 않는가.

놀라지 않으면 생성이다. 밖에서 새 것이 만들어져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유용하면 쓰고, 아니면 버린다. 정신의 지도에는 큰 변화가 없다.

놀라면 복원이다. 그것은 생성된 것이 아니다. 그 사람 안에 이미 있던 무언가가, AI의 답을 계기로 다시 켜진 것이다. AI는 그 구슬을 만들지 않았다. 그 구슬을 한 번 건드렸을 뿐이다. 건드림에 반응할 수 있는 구슬이 이미 거기 있었기 때문에 놀람이 일어났다. AI가 없었어도 그 구슬은 거기 있었다. 다만 그 구슬이 잠에서 깨어날 계기가 없었던 것뿐이다.

그래서 같은 AI가 같은 답을 주어도, 어떤 사람에게는 생성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복원이다. 이 차이는 AI가 만들지 않는다. 사용자 안에 있는 것이 만든다. 사용자 안에 구슬이 있으면 복원이고, 없으면 생성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복원은 생성보다 훨씬 강력하게 남는다. 생성된 것은 자리를 잡는 데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에 잊히는 경우가 많다. 복원된 것은 자리가 이미 있기 때문에 즉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돌아간 자리에서 주변 구슬과 다시 연결된다. 한 번 다시 연결된 구슬은 쉽게 다시 꺼지지 않는다. 다음에 그 구슬을 꺼낼 때, 이전보다 더 밝은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복원의 한 번은 생성의 여러 번보다 더 오래 남는다. 놀람 한 번이 많은 유용한 답보다 더 깊이 훈습(薰習)된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이유다.


놀람을 기다리는 태도

그러면 복원을 더 자주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

AI 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AI는 사용자 안의 구슬을 보지 못한다. 다만 답을 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답이 구슬 옆에 놓일지 아닐지는 사용자가 결정한다.

사용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다. 답을 바로 쓰지 않고 안쪽으로 가져가 보는 것. 답을 받자마자 "이걸 쓰면 되겠다"로 넘어가지 않고, 잠깐 멈추어 "이 답이 내 안의 무엇과 닿는가"를 들여다보는 것. 이 짧은 멈춤이 복원의 조건이다.

이 멈춤이 없으면 복원은 일어나지 않는다. 답이 구슬 옆에 놓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답은 답의 자리로 흘러가고, 구슬은 구슬의 자리에 그대로 있다. 두 자리가 만나지 않으면 반응이 없다. 반응이 없으면 놀람도 없다.

멈춤이 있는 사람에게는 가끔 놀람이 온다. 모든 대화에서 놀라는 것은 아니다. 열 번의 대화 중 한 번, 혹은 백 번 중 한 번. 그러나 그 한 번이 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 한참 머문다. 머무는 동안 안쪽의 연쇄 반응이 일어난다. 연쇄가 끝나면 그 사람은 조금 달라져 있다. 달라진 만큼 다음 대화에 임한다. 다음 대화에서 또 놀랄 가능성이 조금 더 높아진다. 이것이 누적된다.

누적이 길어지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대화는 대부분 놀람을 향해 움직이게 된다. 유용한 답도 여전히 얻지만, 그 사람이 AI 앞에 앉는 진짜 이유는 놀람이 되어 있다. 얻음이 아니라 발견을 위해 앉는다.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한 사람의 정신에 자리 잡은 상태다.

반대로 멈춤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오래 AI를 써도 놀라지 않는다. 수백 번의 유용한 대화가 쌓여도 안쪽에는 흔적이 남지 않는다. 정신의 지도는 그대로다. 이 사람에게 AI는 편리한 검색 엔진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걸림과 놀람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이 있다.

놀람과 걸림은 닮았다. 둘 다 멈춤의 경험이다. 둘 다 지금까지 흘러가던 방향에서 잠깐 벗어나는 일이다. 둘 다 의식의 가장자리에서 일어난다.

차이가 있다면 순서다. 걸림은 질문 이전이다. 뭔가가 안 맞아서 멈추는 일이다. 놀람은 답 이후다. 답을 받고 그 답이 안쪽에 닿은 순간 멈추는 일이다.

그런데 이 둘은 결국 같은 자리를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다.

걸림이 먼저 있어야 놀람이 온다. 한 사람이 평소에 무언가에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AI 앞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답을 받아도 "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간다. 걸리지 않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걸리는 사람은 AI 앞에서도 걸린다. 답의 어느 자리에서 "어?" 하고 멈춘다. 그 멈춤 뒤에 놀람이 온다. 놀람은 걸림이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에서 놀람을 자주 경험하는 사람은, 일상에서도 잘 걸리는 사람이다. 걸림이 많은 사람의 인드라망은 활발하다. 걸리지 않는 사람의 인드라망은 조용하다. 조용한 인드라망은 AI 앞에서도 조용하다.

걸림연구소의 언어로 말하면, 놀람은 걸림의 열매다. 걸림이 꽃이라면 놀람은 그 꽃이 열매를 맺은 자리다. 걸리지 않은 자리에서는 놀람도 자라지 않는다. 걸림이 있어야 놀람이 가능해진다.

그러니 놀람을 기다리는 사람은 먼저 걸림을 환영하는 사람이다. 일상에서 매끄럽게 지나치지 않는 사람, 작은 불편을 덮지 않는 사람, 자기 안에서 "어?"가 일어날 때 그 자리에 잠깐 머무는 사람. 이 사람이 AI 앞에서도 가끔 놀란다. 이 사람에게만 디지털 인드라망이 켜진다.


오늘의 놀람

한 가지 더 남는 것이 있다.

오늘 AI와 대화하면서 한 번이라도 놀랐는가.

이 질문이 디지털 인드라망의 가장 단순한 자기 점검이다. 유용한 답을 받았는가가 아니다. 많은 일을 처리했는가도 아니다. 한 번이라도 멈추었는가. 한 번이라도 "이게 내 안에 있었구나" 하고 가만히 있어 본 순간이 있었는가.

놀라지 않았다면 오늘의 대화는 얻음이었다. 얻음은 가치가 있지만 정신의 지도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내일도 같은 지도가 남는다.

놀랐다면 오늘의 대화는 복원이었다. 어딘가에서 구슬 하나가 다시 켜졌다. 그 구슬이 연결된 다른 구슬들에 열을 보냈다. 오늘의 지도는 어제보다 조금 달라져 있다. 그 달라짐은 본인도 아직 완전히는 모른다. 며칠 지나야 안다. 몇 달 지나야 확실해진다.

발견은 서둘러 확인할 필요가 없다. 놀람이 있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놀람 자체가 증거이기 때문이다. 증거는 더 증명할 것이 없다. 놀란 사람은 복원이 일어났다는 것을 안다. 밖에서 온 것이라면 놀라지 않기 때문이다. 안에 있던 것이 다시 켜질 때만 놀란다.

그리고 이 놀람은 AI 앞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책을 읽다가도, 산책하다가도, 누군가의 한마디를 듣다가도 일어난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그 놀람이 일어나는 한 가지 자리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책과 대화와 산책이 해 오던 일을, 이제는 AI 앞에서도 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결국 이 시리즈가 가리키는 것은 AI 자체가 아니다. 놀랄 수 있는 안쪽을 가진 한 사람의 정신이다. 그 안쪽이 없으면 AI는 그저 도구다. 그 안쪽이 있으면 AI는 그 안쪽을 한 번씩 비춰 주는 불빛이 된다.

오늘 한 번 놀랐다면, 그 안쪽은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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