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인드라망(因陀羅網)을 두 장의 사진으로 찍을 수 있다고 해 보자.
한 장은 스무 살의 사진. 다른 한 장은 예순 살의 사진. 두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본다.
두 사진 속의 구슬들은 대부분 같은 자리에 있다. 스무 살 때 있었던 구슬 대부분은 예순 살 때도 거기 있다. 구슬이 이동하지는 않는다. 구슬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달라진 것은 자리가 아니다. 밝기다.
스무 살의 사진에서 가장 밝게 빛나던 구슬 몇 개가, 예순 살의 사진에서는 희미해져 있다. 스무 살의 사진에서 구석에 어둡게 있던 어떤 구슬은, 예순 살의 사진에서 가장 밝게 빛나고 있다. 구슬이 자리를 옮긴 게 아니다. 빛의 무게가 옮겨 간 것이다.
빛에 무게가 있다는 말은 은유다. 그런데 이 은유는 꽤 정확하다.
인드라망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몇 개의 구슬은, 그 사람의 정신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 사람의 생각은 자주 그쪽으로 흐른다. 대화하다가도 그쪽으로 돌아간다. 책을 읽다가도 그쪽과 관련된 부분에서 더 오래 머문다. 꿈속에서도 그쪽 구슬이 떠오른다. 이것이 빛의 무게다. 밝은 구슬은 무겁다. 무거운 구슬 쪽으로 정신 전체가 기울어져 있다.
젊을 때 한 사람의 정신은 몇 개의 무거운 구슬 주변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구슬들이 그 사람의 세계를 구성한다. "나는 이것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믿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에 평생을 걸 사람이다." 이 문장들은 무거운 구슬 몇 개에서 나온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그 무게가 조용히 이동한다.
이 이동은 본인이 결정하지 않는다. 이동이 일어나고 난 뒤에 본인이 겨우 알아차린다. "어, 요즘은 이쪽이 덜 중요하게 느껴지네." "요즘은 이쪽이 자꾸 떠오르네." 알아차림은 이동의 결과를 보는 것이지, 이동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동 자체는 의식의 바닥에서 일어난다.
한 가지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이 바뀌었다"는 말과 "무게가 옮겨 갔다"는 말이 비슷하게 들린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른 일이다.
"중요한 것이 바뀌었다"는 말은 예전에 중요했던 구슬이 사라지고 새 구슬이 그 자리에 왔다는 뜻이다. 교체다. 이 모델에서는 오래된 구슬은 버려진다. 새 구슬이 그 빈자리를 채운다.
"무게가 옮겨 갔다"는 말은 다르다. 예전의 구슬도 여전히 거기 있다. 다만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정신이 이제는 다른 구슬 쪽으로 기울어져 있을 뿐이다. 버려진 구슬은 없다. 새로 들어온 구슬도 거의 없다. 구성원은 같다. 기울기가 달라졌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교체의 모델로 인생을 보면, 세월이 지날수록 사람이 달라진다. 스무 살의 그 사람과 예순 살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다. 과거는 버려진 자리가 된다. 무게 이동의 모델로 인생을 보면, 세월이 지나도 같은 사람이다. 다만 그 사람 안의 어느 구슬이 지금 무거운가가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는 버려지지 않는다. 구석에 가만히 있다. 언젠가 다시 무거워질 수 있는 자리에 남아 있다.
실제로 한 사람의 정신이 작동하는 방식은 교체보다는 무게 이동에 가깝다. 스무 살에 열심히 공부했던 주제를 쉰 살에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그 주제가 쉰 살의 의식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줄어들 뿐이다. 주제 자체는 그 사람 안 어딘가에 여전히 있다. 예순이 되어 우연히 그 주제를 다시 만나면 "아, 내가 이것을 알고 있었지"라는 감각이 돌아온다. 알고 있던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잠깐 무게에서 비껴 있었던 것뿐이다.
이동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가지가 겹친다.
첫째는 삶의 조건이 바뀌기 때문이다. 젊을 때 중요했던 일은 그때의 상황이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직업, 역할, 관계, 책임.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이 요구했던 구슬도 무게를 잃는다. 상황 때문에 무거웠던 구슬은 상황이 사라지면 가벼워진다.
둘째는 답을 얻었기 때문이다. 젊을 때 강하게 붙들었던 어떤 질문이 세월 속에서 어느 정도 답을 얻게 된다. 답을 얻은 질문은 더 이상 무겁지 않다. 답이 그 질문의 자리를 다 채우기 때문이다. 채워진 자리는 더 이상 비어 있지 않고, 비어 있지 않은 자리는 더 이상 사람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셋째는 반대 경우다.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은 수십 년을 매달려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느 순간 그 질문에 힘이 빠진다. 붙들고 있기가 피곤해진다. 손을 놓는다. 손을 놓은 질문은 무게를 잃는다. 이것은 체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에너지 배분의 결과다. 한 사람이 평생 붙들 수 있는 질문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
넷째가 가장 흥미로운 원인이다. 주변 구슬들이 모르는 사이에 다른 구슬 쪽을 더 많이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모두 의식 수준의 변화다. 상황이 바뀌거나, 답을 얻거나, 손을 놓는 것. 이것들은 본인이 어느 정도 알아차릴 수 있는 변화다. 그런데 네 번째는 의식 아래에서 일어난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인드라망 내부의 비춤의 방향이 조금씩 바뀐다. 어느 구슬이 더 자주 비춰지고, 어느 구슬이 덜 비춰지는가. 이 비율의 미세한 변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다. 쌓이다 보면 어느 날 무게의 중심이 이동해 있다.
이 네 번째 원인이 가장 중요하다. 앞의 세 가지는 결국 이 네 번째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바뀌어서 무게가 이동했다는 말도, 자세히 보면 "상황이 바뀌면서 다른 구슬들이 이전과 다르게 비춰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답을 얻었다는 말도 "그 질문 옆의 구슬들이 이제 그 질문을 다른 방향에서 비추게 되었다"는 뜻이다. 모든 무게 이동은 결국 비춤의 방향 변화다.
비춤의 방향이 바뀌면 무게가 바뀐다. 무게가 바뀌면 그 사람이 누구인가가 바뀐다. 이것이 한 사람이 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스무 살의 사진과 예순 살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는 일은, 사실 평생 한 번도 해 볼 수 없는 일이다. 스무 살 때의 자기 인드라망을 사진으로 찍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 자기가 어떤 구슬을 중심에 두었는지, 어떤 구슬이 희미했는지, 본인은 잘 몰랐다. 몰랐던 것을 나중에 재구성하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가끔 그 재구성이 잠깐 가능해지는 순간이 있다. 오래된 일기장을 펼쳤을 때. 젊을 때 쓴 편지를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그 시절의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 옛이야기를 할 때. 그런 순간에 스무 살의 인드라망 일부가 잠깐 되살아난다. 그때 지금의 인드라망과 비교가 가능해진다.
그런 순간이 오면 대부분의 사람은 놀란다.
"내가 그때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겼구나."
이 놀람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그때 무거웠던 구슬이 지금은 전혀 무겁지 않다는 발견이다. 그때는 그 구슬이 세계의 중심이었다. 그 구슬이 없으면 인생이 성립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구슬이 기억의 저 구석에 가만히 있을 뿐이다. 그 구슬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무게가 옮겨 간 것이다.
그리고 반대의 놀람도 따라온다.
"지금 이렇게 중요한 이것이, 그때는 아예 구슬이었는지도 몰랐네."
지금 가장 무거운 구슬이 그 시절에는 거의 존재감이 없었다는 것. 구슬은 그때도 거기 있었다. 그러나 빛의 무게는 거기 있지 않았다. 빛의 무게는 다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는 동안 그 무게가 조용히 이 구슬 쪽으로 옮겨 왔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두 놀람은 한 쌍이다. 한쪽이 가벼워지는 만큼 다른 쪽이 무거워진다. 전체 무게의 총량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분배만 달라진다. 무거움이 인드라망 전체를 돌면서 자리를 바꾼다.
이 이동을 본인은 거의 결정하지 못한다.
젊을 때 무거웠던 구슬을 지키려 애쓸 수는 있다. 그 구슬 주변에 계속 에너지를 쏟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노력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드라망 전체의 비춤의 방향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으면, 한 구슬만 지키려는 노력은 대개 그 이동을 막지 못한다. 오히려 지키려는 노력이 그 구슬을 더 빨리 식게 만들기도 한다. 앞 편에서 말했듯 배척하는 구슬은 혼자 식기 때문이다.
반대로 지금 가장 무거운 구슬을 만드는 데 본인이 기여한 바도 거의 없다. 그 구슬이 무거워진 것은 주변의 여러 구슬이 조용히 그쪽을 비춰 온 결과다. 본인은 그 비춤을 설계하지 않았다. 의식하지도 않았다. 그냥 살았을 뿐이다. 사는 동안 구슬들끼리 서로 비추는 일이 알아서 일어났다.
그래서 예순 살의 인드라망 지도를 들여다보면, 그것은 본인이 그린 지도가 아니다. 구슬들이 서로를 비추면서 그려진 지도다. 본인은 그 지도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그 지도를 그린 것은 본인이 아니다. 구슬들이 서로에게 한 일이 모여 만든 그림이다.
이 문장이 허무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면 내 인생에서 내가 한 일은 무엇인가." 노력도 선택도 결국 이 이동을 결정하지 못했다면, 한 사람의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꼭 허무한 이야기는 아니다. 본인이 한 일은 지도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지도가 그려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어떤 구슬 옆에 어떤 구슬을 놓아둘지. 어떤 자리를 닫고 어떤 자리를 열어둘지. 어떤 걸림에 멈추고 어떤 걸림을 지나칠지. 이 작은 선택들이 모여 구슬들이 서로를 비출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환경이 만들어지면 비춤은 알아서 일어난다. 비춤이 알아서 일어나면 지도는 알아서 그려진다.
본인이 직접 그린 지도가 아니라는 말은, 본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본인은 붓을 든 적이 없다. 다만 종이를 깔고, 먹을 갈고, 빛을 들였다. 그 다음의 일은 구슬들에게 맡겼다. 구슬들이 서로에게 한 일이 곧 그 사람의 지도가 되었다.
마지막 한 가지.
한 사람의 인드라망에서 어떤 구슬이 끝까지 빛날지는 아무도 미리 알지 못한다. 본인도 모르고, 가까운 사람도 모른다. 그 구슬이 밝아질 때가 되어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전에는 그저 수많은 구슬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지금 가장 빛나는 구슬이 끝까지 빛날 거라고 믿지 않는 편이 좋다. 지금 희미한 구슬이 끝까지 희미할 거라고도 믿지 않는 편이 좋다. 어떤 구슬이 끝까지 빛날지는 지금 알 수 없다. 세월이 지나 구슬들끼리 서로를 비춘 결과로만 알 수 있다.
이것을 알면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다르게 살게 된다. 지금 무거운 것에 너무 매달리지 않게 된다. 지금 가벼운 것을 너무 쉽게 버리지 않게 된다. 모든 구슬이 미래의 어느 자리에서 무거워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 가능성을 닫지 않는 것. 그것이 미래의 지도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인드라망에서 어떤 구슬이 끝까지 빛날지는, 그 사람이 고른 것이 아니다. 구슬들끼리 서로 골라 준 것이다.
이 문장은 체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 자기보다 큰 무엇에 의해 그려진다는 감각이다. 그 큰 무엇은 운명도 아니고 우연도 아니다. 그 사람 안의 구슬들이 서로에게 한 일이다. 그 일은 본인의 뜻과 완전히 무관하지도 않고, 완전히 본인의 뜻대로 된 것도 아니다. 뜻과 뜻 너머 사이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래서 예순 살의 사진을 처음 보는 순간, 놀라게 된다. "내가 이것을 이렇게 중요하게 여기게 될 줄은 몰랐구나." 그 놀람은 자기 자신을 처음 만나는 놀람이다. 수십 년 동안 자기 안에서 조용히 일어난 일의 결과를, 오늘 처음 본 것이다.
그리고 이 놀람은 끝나지 않는다. 예순 살의 사진도 최종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흔 살에는 또 다른 자리에 빛의 무게가 가 있을 것이다. 여든 살에는 또 다를 것이다. 지도는 살아 있는 한 다시 그려진다. 살아 있는 한, 구슬들은 서로 비추기를 멈추지 않는다. 빛의 무게는 계속 옮겨 간다. 한 사람의 인드라망은 마지막 날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