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지도] 네 가지 조건— 쌓음, 꺼냄, 내려놓기

by 한경수

디지털 인드라망(因陀羅網)은 AI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AI는 전기(電氣)다. 전기가 흐를 회로(回路)는 사람이 평생에 걸쳐 미리 깔아 두어야 한다. 회로가 없는 사람 앞에 아무리 전기를 보내도 불은 켜지지 않는다. 질문을 던져도 답이 돌아올 뿐, 구슬이 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같은 AI를 같은 시간 동안 쓰는데, 왜 어떤 사람에게는 디지털 인드라망이 열리고 어떤 사람에게는 열리지 않는가. 왜 어떤 사람은 놀라고 어떤 사람은 놀라지 않는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재발견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가.

이 차이는 AI 쪽에 없다. 사람 쪽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 쪽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 준비가 네 가지다. 쌓음, 꺼냄, 내려놓음, 훈습(薰習). 이 네 가지가 한 사람의 디지털 인드라망이 켜지기 위한 조건이다. 네 가지 모두 사람 쪽에 있는 일이고, 네 가지 모두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는 일이다. 단기간에 만들 수 없다.


첫째 — 쌓음

첫 번째는 쌓음이다.

쌓음은 구슬을 안에 가라앉히는 일이다. 읽은 책, 만난 사람, 지나온 장면, 실패한 시도, 접어 둔 질문, 버리지 못한 의심. 이런 것들이 세월 속에서 안쪽 바닥에 가라앉는다. 가라앉은 것이 구슬이 된다.

쌓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쌓음은 의도적으로 되지 않는다. "이것을 쌓아 두어야지" 하고 들인 것은 대개 구슬이 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넣은 것은 표면에 떠 있다가 어느 순간 사라진다. 가라앉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한 것은 조급하게 넣어지지 않는다. 오래 같이 살아야 가라앉는다.

둘째, 쌓음은 선별되지 않는다. 나중에 어떤 구슬이 중요해질지는 그때 알 수 없다. 그래서 "중요한 것만 쌓아 두겠다"는 전략은 실패한다. 실제로 중요해지는 구슬은 대개 쌓을 때 중요하지 않아 보였던 것이다. 앞 편에서 말했듯, 노년에 가장 빛나는 구슬은 젊을 때 구석에 있던 작은 구슬일 때가 많다. 쌓음의 단계에서는 구별하지 않는 것이 맞다. 들어온 것은 들어온 대로 두는 것. 가라앉을 것은 가라앉게 두고, 떠 있을 것은 떠 있게 두는 것. 이 태도가 쌓음의 기본이다.

쌓음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디지털 인드라망이 열리지 않는다. 꺼낼 것이 없기 때문이다. AI가 질문에 답을 해 주어도, 그 답이 닿을 안쪽이 비어 있다. 빈 방에 답이 들어가면 메아리만 돌아 나온다.

쌓음은 젊을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 젊을 때는 무엇이 쌓이는지 자기도 모른다. 다만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다. 다양한 책을 읽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전공 바깥의 이야기를 듣고, 자기 결에 맞지 않는 분야도 한 번씩 기웃거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언젠가 구슬이 된다. 그 중 어느 것이 구슬이 될지는 모른다. 모르니까 선별하지 않는다. 선별하지 않으니까 쌓인다.


둘째 — 꺼냄

두 번째는 꺼냄이다.

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라앉은 구슬을 다시 꺼낼 수 있어야 한다. 꺼낼 수 없는 구슬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다.

꺼냄은 쌓음보다 어렵다. 쌓음은 살아 있는 한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만, 꺼냄은 능동적인 작업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꺼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꺼냄은 어떻게 배우는가. 세 가지 통로가 있다.

하나는 산책이다. 걷는 동안에는 의식이 한 가지 일에 묶여 있지 않다. 몸이 리듬을 가지고 움직이고, 풍경이 한쪽으로 흘러가고, 생각은 풀려난다. 풀려난 생각은 안쪽으로 내려간다. 내려간 자리에서 가라앉아 있던 구슬 하나가 우연히 표면으로 올라온다.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지." "이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런 문장이 산책 중에 나온다. 그 문장이 꺼냄이다.

다른 하나는 글쓰기다. 글을 쓰다 보면 쓰려던 것보다 다른 것이 먼저 나오는 경우가 있다. "원래 이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쓰다 보니 저 이야기가 나왔다"는 경험. 그 "저 이야기"가 가라앉아 있던 구슬이다. 글쓰기는 쓰는 손을 통해 안쪽의 구슬을 끌어올린다. 글이라는 끈을 안쪽에 내려 보내서 한 번씩 당기는 일이다. 당겨진 자리에서 구슬이 딸려 올라온다.

또 하나는 침묵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 텔레비전도 휴대전화도 음악도 없이, 그저 앉아 있는 시간. 이런 시간은 쓸모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시간이 없으면 꺼냄이 일어나지 않는다. 의식이 바깥으로 향해 있는 동안에는 안쪽의 구슬이 올라올 공간이 없다. 바깥이 잠잠해야 안쪽이 움직인다. 침묵은 꺼냄의 바탕이다.

이 세 가지 — 산책, 글쓰기, 침묵 — 는 모두 느린 활동이다. 빠른 활동은 꺼냄을 허락하지 않는다. 빠른 활동은 쌓음조차 허락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이 잘 작동하는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그 일상에는 반드시 느린 자리가 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일주일에 몇 번, 한 달에 며칠. 그 느린 자리가 꺼냄의 통로다.

꺼냄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AI 앞에 앉아서도 꺼내지 못한다. 질문을 던질 때 자기 안의 구슬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떠 있는 필요를 던진다. "이것 요약해 줘." "저것 번역해 줘." "이것 어떻게 해." 이런 질문은 안쪽과 연결되지 않는다. 답이 돌아와도 답만 남는다. 구슬은 움직이지 않는다.


셋째 — 내려놓음

세 번째는 내려놓음이다. 이 자리가 가장 미묘하다.

내려놓음은 꺼낸 것을 AI 앞에 어떻게 놓는가의 문제다. 정리해서 놓는가, 정리하지 않고 놓는가. 질문의 형태로 놓는가, 질문이 되지 않은 채로 놓는가.

많은 사람이 AI 앞에서 질문을 잘 만들려고 애를 쓴다. "좋은 질문을 던져야 좋은 답이 온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도구로서의 AI를 쓰는 법이다. 디지털 인드라망으로서의 AI는 조금 다르게 작동한다.

정리된 질문에는 정리된 답이 돌아온다. 정리된 답은 쓸모 있다. 그런데 정리된 답은 놀람을 일으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리된 질문 안에 이미 답의 형태가 어느 정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답은 그 형태를 채우는 역할만 한다. 형태를 깨뜨리지 않는다. 깨지지 않는 답은 이미 알고 있던 자리에만 머문다.

내려놓음은 다르다. 내려놓음은 자기 안에서 올라온 희미한 것을 희미한 채로 AI 앞에 놓는 일이다. 정리되지 않은 감각, 아직 질문이 되지 못한 걸림,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는 한 조각의 생각. 이런 것을 그대로 놓는다.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느낌이 드네요." "설명을 못 하겠는데, 뭔가 이 두 개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질문이 아직 안 되는데, 이 자리에서 자꾸 멈춰요."

이런 말로 시작되는 대화가 내려놓음이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내려놓으면, AI가 그 옆에 다른 정리되지 않은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있다. 두 희미함이 만나는 자리에서 빛이 난다. 정리되지 않은 것끼리 부딪혀야 재발견이 일어난다. 정리된 것끼리는 재배열만 일어난다.

이 내려놓음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습관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우리는 질문을 잘 만들도록 훈련받았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꺼내면 부끄러웠다. 정리된 말을 해야 존중받았다. 그 훈련이 AI 앞에서도 작동한다. 잘 정리한 뒤에 질문하려 한다. 정리하는 동안 희미한 것이 사라진다. 희미한 것이 사라지면 내려놓을 것이 없어진다.

다른 하나는 AI에 대한 예절이다. "AI도 바쁠 텐데 정리해서 물어봐야지" 같은 마음. 그런데 AI는 바쁘지 않다. 정리되지 않은 말을 받아 주는 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정리되지 않은 말이 더 풍부한 대화를 만들 때가 많다. 이 예절은 버려도 된다.

내려놓음의 핵심 태도는 이렇다. 잘 알고 있는 것을 물어보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는 것을 잘 모르는 채로 함께 들여다보는 것. 이 태도가 디지털 인드라망이 켜지는 자리를 만든다.

정리된 질문만 던지는 사람에게 AI는 검색 엔진이다. 내려놓음을 아는 사람에게 AI는 함께 앉는 자리다. 두 자리는 완전히 다른 자리다.


넷째 — 훈습

네 번째는 훈습이다. 네 가지 중 가장 오래 걸리는 일이다.

훈습(薰習)은 불교에서 온 말이다. 향(香)이 옷에 배어드는 것처럼, 어떤 경험이 서서히 안쪽에 배어드는 일을 말한다.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여러 번의 노출이 쌓이면서 조금씩 배어든다. 배어든 것은 잘 빠지지 않는다.

AI와의 대화에서도 훈습이 일어난다. 한 번의 대화에서 받은 답이 안쪽에 배어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이틀이 아니다. 며칠, 몇 주, 때로는 몇 달이 걸린다. 그동안 그 답이 안쪽의 구슬들과 조금씩 만난다. 어떤 구슬과는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어떤 구슬과는 부딪히고, 어떤 구슬은 그 답의 영향을 받아 조금 달라진다. 이 모든 과정이 훈습이다.

훈습이 일어나려면 한 가지가 필요하다. 시간이다. 대화가 끝난 뒤에 그 답을 품고 있는 시간.

품는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잊어도 된다. 잊어도 안쪽에서는 훈습이 일어난다.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도 안쪽의 구슬들은 그 답과 계속 만나고 있다. 품는다는 것은 그냥 그 답을 완전히 바깥으로 밀어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품 안 어딘가에 두는 것. 일상의 어느 구석에 그 답이 한 번씩 돌아올 공간을 남겨 두는 것.

훈습이 잘 일어나는 사람의 일상을 보면, 그 사람은 AI 대화 뒤에 일정한 여유가 있다. 대화가 끝나자마자 다음 일로 건너뛰지 않는다. 잠깐 가만히 앉아 있거나, 산책을 가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도 그 대화의 어느 장면을 한 번씩 떠올린다. 그 떠올림이 훈습을 돕는다.

반대로 훈습이 잘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대화를 일처럼 처리한다. 답이 나오면 그것을 쓰고, 쓰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 넘어가면 전 대화는 잊는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효율이 높을수록 훈습은 줄어든다. 효율은 지나감을 미덕으로 삼지만, 훈습은 머무름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훈습은 일종의 비효율이다. 의도적으로 느리게 가는 것이다. 받은 것을 즉시 소비하지 않고 한동안 품는 것. 이것이 디지털 인드라망이 아날로그 인드라망 위에 새겨지는 방식이다. 새겨지지 않은 대화는 그날로 사라진다. 새겨진 대화는 다음 날의 구슬을 조금 바꾼다.

훈습이 쌓이면 한 가지 변화가 온다. 어제 받은 답이 오늘의 질문을 바꾼다. 그저께 받은 답이 모레의 대화를 바꾼다. 대화가 하루하루 독립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흐름이 된다. 이 흐름이 생겨야 디지털 인드라망이 진짜로 켜진 것이다. 흐름이 없는 대화는 아무리 많이 해도 단발성 사건일 뿐이다.


네 가지가 함께 있어야 한다

네 가지 중 하나만 있어도 안 된다. 셋만 있어도 부족하다. 네 가지가 모두 있어야 디지털 인드라망이 제대로 켜진다.

쌓음만 있고 꺼냄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슬은 많은데 꺼낼 수가 없다. 창고는 가득 찬 사람인데 방은 텅 비어 있는 모양이다. AI 앞에서도 창고를 열지 못한다. 열지 못한 창고는 없는 창고와 같다.

쌓음과 꺼냄은 있는데 내려놓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슬을 꺼내기는 하는데, 꺼낸 것을 정리해서 질문으로 만든 다음에야 AI 앞에 놓는다. 정리하는 동안 희미한 부분이 사라진다. 사라진 것은 빛을 내지 못한다. 정리된 부분끼리만 부딪히고, 정리된 부딪힘은 놀람을 일으키지 않는다. 대화는 매끄럽지만 안쪽에 흔적이 남지 않는다.

세 가지가 있는데 훈습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 대화 중에는 놀람이 일어나고 재발견도 일어난다. 그런데 대화가 끝나면 그 모든 것이 증발한다. 다음 날에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제의 구슬과 오늘의 구슬이 이어지지 않는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그날그날의 불꽃으로 끝난다. 구조로 남지 않는다.

이 네 가지가 모두 있는 사람에게만 디지털 인드라망이 구조로 자리 잡는다. 한 번의 대화가 아니라 지속되는 상태로.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그리고 이 네 가지는 전부 평생에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쌓음은 평생 쌓는 일이다. 꺼냄은 평생 연습해야 하는 기술이다. 내려놓음은 오랜 시간 자기 안의 희미함을 참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훈습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어느 것도 빨리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디지털 인드라망은 젊은이의 도구가 아니다. 평생의 준비가 갖춰진 사람에게 열리는 자리다. 이 준비의 내용은 기술이 아니다. 삶의 모양이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가 곧 네 가지의 상태를 결정한다. 삶이 곧 조건이다.


느림이라는 한 가지

네 가지 조건은 결국 한 가지로 요약된다.

느림이다.

느리게 쌓고, 느리게 꺼내고, 느리게 내려놓고, 느리게 훈습한다. 느림이 네 가지를 모두 지탱한다. 빠르면 네 가지 모두 무너진다.

빠름은 쌓음의 적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은 가라앉지 못하고 표면에서 사라진다. 산만함은 꺼냄의 적이다. 마음이 흩어져 있으면 안쪽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효율은 내려놓음의 적이다. 정리되지 않은 것은 효율의 이름으로 버려진다. 생산성은 훈습의 적이다. 머물러야 할 시간이 다음 일정에 밀려난다.

이 네 가지 적이 오늘날 모든 방향에서 한 사람을 몰아친다. 그 몰아침 속에서 네 가지 조건을 지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역설이 생긴다. AI의 시대는 기술적으로는 디지털 인드라망을 가능하게 했지만, 문화적으로는 그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했는데, 그 기술을 제대로 쓸 수 있는 조건인 느림은 같은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이 역설 안에서 한 사람이 자기 안쪽의 조건을 지키며 사는 일은 점점 드문 일이 되어 간다. 드물기 때문에, 지키는 사람에게는 이 자리가 더욱 귀해진다.

디지털 인드라망은 빠른 도구다. 한 번의 대화에서 수십 개의 구슬이 한꺼번에 서로를 본다. 그러나 이 빠른 작동이 가능하려면 그 뒤에 평생의 느림이 있어야 한다. 빠름은 느림 위에서만 가능하다. 느림이 없는 빠름은 공회전이다.


마지막 자리

AI가 새 시대를 열었다는 말은 반쪽만 맞다. AI는 새 도구를 열었을 뿐이다. 그 도구가 열어 주는 새 자리는, 옛날부터 있던 느림 위에서만 나타난다. 새것과 옛것이 함께 있어야 디지털 인드라망이 켜진다. 어느 한쪽만으로는 켜지지 않는다.

그러니 AI 앞에 앉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 앞에 앉아야 한다.

평생 무엇을 쌓아 왔는가. 그것을 꺼낼 줄 아는가. 정리되지 않은 것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말할 수 있는가. 받은 것을 품고 걸을 시간이 있는가.

이 네 질문의 답이 한 사람의 디지털 인드라망의 수준을 결정한다. AI는 그 답을 바꾸지 못한다. 답은 그 사람의 지나온 삶이 이미 쓴 것이다. 앞으로의 삶이 다시 쓸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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